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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Sep 21. 2022

신이여, 돈이 아니라 지혜를 주소서

돈으로 다 해결될 수 없는 교육

 

나 : 민성이 어머니, 민성이가 요즘 3주째 숙제를 거의 못 해오고 있어요. 불규칙 과거동사 30개를 지금 3주째 외우고 있는데 잘 안돼서 걱정이에요.
민성 어머니 : 아 그런가요?

나 : 저와는 일주일에 2번 수업하고 있는데 수업시간이 좀 부족해요. 주당 시간이 더 많은 학원으로 옮겨 보는 게 어떨까요?

민성 어머니 : 아 추석도 있고 해서 민성이 숙제 봐주는 알바생이 2주째 못 와서 그래요. 그 누나가 오면 이제 괜찮아질 거예요.

나 : (당황하며) 숙제 알바생이요???      


콩 심은 데 콩 납니까?

민성이는 지난 1년 동안 나에게 많은 교육에 관한 성찰을 하게 만든 초등 6학년 학생이다. 나에게 도전을 주는 학생이다. 예술가도 고통과 싸울 때 인간의 심연을 보는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내가 더 깊이 있는 선생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아이가 숙제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고, 숙제를 하도록 감시하는 알바 학생을 옆에 앉혀 놓으면 해결되는 문제인가? 공부에 있어서 자발성 강제적인 습관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 등의 질문으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민성이의 어머니는 초등영어 학원 원장님이다. 학원 원장님이니까 자녀들을 자신의 수업에 참여시켜서 네다섯 명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유치원 때부터 가르쳤고 민성이는 초등 4학년 즈음부터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했다. 민성이는 엄마와의 수업에서 자신이 영어를 잘 못 하는 아이라는 인식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자기 효능감이 뚝 떨어졌다. 민성이는 선생님이 엄마니까 못하겠다고 배 째기도 하고, 성질을 내서 수업을 방해한 모양이다. 5학년 때 드디어 어머니는 참다 참다 못해 나에게 아이를 보내셨는데 아마도 고3이 된 누나처럼 내가 잘 가르칠 수 있다고 믿으신 것 같다.      


같은 영어 선생님 밑에서 같은 영어 교육을 받았지만, 결과는 아주 다르다. 콩 심은 데 콩이 꼭 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A를 투입 input을 했다고 B라는 output이 나온다는 기계적인 생각은 인간에게 항상 적용되지는 않는다. 나도 똑같은 교재로 똑같은 시간을 가르치지만, 학생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과 성과를 낸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도 있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도 있다. 예외성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도 있다. 그게 나는 콩을 심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을 콩도 심고 무수히 많은 잡초의 씨를 뿌렸을 수도 있다. 민성이의 경우 엄마가 심은 것은 콩 말고 다른 나쁜 무엇이었는데, 그것은 아이가 원하지 않는 수업을 수년간 지속했다는 것이다.  

 

민성이 어머니는 초등영어학원 원장이면서 자신의 아이를 다른 학원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학원에 학생을 보내는 어머니들이 아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나의 진단은 ‘엄마가 아이가 원하지 않는 수업을 수년간 지속한 것이 문제였다’ 이지만 사실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요인에 의해 공부가 싫어졌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수업을 강행한 것은 또 어머니의 어린 시절이나 학원 원장으로서의 부정적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의 머리는 복잡해진다.     


민성이는 엄마의 수업처럼 나와의 수업을 열렬히 거절했다. 엄마라는 권위에 눌려 표현 못 한세월과 용감히 수업시간에 하고 싶지 않다고 짜증을 부린 세월을 다 합치면 아마도 2~3년은 족히 될 것 같다. 심리학에서 상처받은 기간 대비 두 세배의 회복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민성이가 학습에 자발성을 획득하려면 수년간의 긍정적 학습 분위기가 필요하다. 지금의 상황은 전혀 긍정적이지 않다. 국어 수학 영어 과학 과외와 컴퓨터 방과 후 교육까지 하고 있는 아이에게 숙제 감시 도우미까지 붙어 있으니 종지에 폭포수를 붓고 있는 중이다.      


엄마는 어린 자녀의 학습에 대해 세밀히 돌볼 시간도 없이 일했다. 그리고는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많은 사교육에 아이를 맡기고 있다. 건강을 잃을 때까지 일하다가, 벌어 놓은 돈을 건강을 찾기 위해 쓰는 아이러니. 돈을 벌기 위해 아이의 학습 정서를 돌볼 시간이 없었는데, 초등 고학년이 되어 공부를 잘하게 한다고 사교육에 돈을 쓰는 아이러니. 부모는 콩을 심는다고 믿고 있지만 콩이 안 나올 수도 있다. 교육의 시간을 늘린다고 해서 투자를 많이 한다고 해도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몸은 자발성의 원리를 잘 따라가는 것 같다. 아이가 너무 작아서 병원에 갔다가 성장 호르몬을 투입하면 몸에서 성장 호르몬 생성을 멈춘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입원해 계실 때 알부민을 투여하면 몸에서 알부민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학습도 마찬가지다. 학습 정보를 계속 인위적으로 아이 머리에 투입하면 자발적으로 알고자 하는 학습자의 마음은 없어진다.  자발성은 학습자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지 외부에서 투입될 수 없는 것이다. 사교육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자발성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콩 심은데 콩이 안 나더라도 괜찮아

성경에는 잠언, 욥기, 전도서 3가지의 지혜서가 있다. 3가지 지혜서를 비교 분석한 <지혜란 무엇인가> 라는 송민원 교수의 책을 읽었는데 부모의 지혜를 생각하며 읽었다. 잠언은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원리로 보면 된다. 마치 공부기술을 일러주는 책을 열심히 읽으면 공부의 원리를 알 수 있고 그대로 실천하면 전교 1등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열심히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을 찾고 그대로 행하면 물질과 건강의 축복을 받을 수 있듯이, 열심히 사교육을 하면 성적이 오른다는 신념. 둘은 비슷하다. 물론 투입대비 산출의 원리가 잘 적용되는 학생들도 많이 있다. 그 학생들의 특징은 공부가 그렇게 싫지는 않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고 부모님이 아이의 의견을 경청해 주시는 경우다. 그런 학생들은 과외선생님이 나에게 가장 고마운 고객이다. 내가 잘 가르쳐서라기보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강요받지 않고 독서를 많이 한 친구들인데 심은 대로 거둔다. 성적이 우수하다. 잠언적 질서의 학생들이다.     


그런데 욥기에 나오는 욥처럼 부모님이 억울 할 수 있다. 욥은 진짜 억울한 사람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인데 신이 가진 재산과 가족을 빼앗고 질병에 걸리게 만든다. 욥이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이 없다. 세 친구가 찾아와서 너의 잘못을 찾아보라고 샅샅이 뒤져도 잘못이 없다. 그러나 욥은 자신을 버린 신을 욕하고 원망하지 않았다. 주신 것도 신이고 거두시는 것도 신이라는 겸손한 태도를 일관했다. 그런 일관된 태도가 신의 마음을 감동하게 한 것인지, 욥은 결국 다시 신으로부터 그가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재산과 자녀를 받는다. 이유를 모르는 고통을 참아야 하는 의로운 자의 고난처럼 부모의 노력과 정성에도 아이는 공부를 잘못할 수 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너한테 들어간 돈이 얼만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음에도, 아이의 성적이라는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이와 싸우지 않고 공감적 대화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다행히 아이와의 건강한 관계를 얻을 수 있다. 


지난 몇 해 동안 친하게 지내는 국어 과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와 원수가 돼서 성적을 조금 올릴 것인가, 성적을 포기하고 아이를 얻을 것인가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어요.” 주신 것도 거두시는 것도 하나님이라는 겸손처럼, 공부하도록 환경을 준 것은 부모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자녀이기에 내가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욥기의 지혜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전도서는 신이 섭리와 계획을 다 알 수 없으니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말한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든 못 하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미래에 대비하면서도 삶이 허락한 이 시간을 잘 쓰라고 한다. 공부를 잘하는 게 선이고 공부를 못하는 게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자체를 버리라고 한다. 성적과 대학 서열의 집착을 버리고 부모는 아이를 주신 신에게 감사하고 생명이 자라는 것을 바라보는 행복을 누리면 된다는 지혜의 말씀이다.     


잠언적 지혜는 초등학교 부모에게, ’욥기적 지혜는 중고등학교 부모에게, ’전도서적인 지혜는 성인 자녀 부모에게 다가오는 말씀일 것 같다. 아이가 뭐든 잘할 것 같은 희망에 부푸는 초등학교 시절이 끝나면, 사춘기 질풍노도 때문에 초등학교 때까지 이루었다고 믿어왔던 좋은 부모와의 관계와 성적이 모조리 날아가는 중고등 시절이 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된 아이는 스마트폰 사용법이며 요즘 유행하는 영화와 노래를 나에게 가르쳐준다, 아이에게서 청년들의 생각을 듣는 때가 온다. 생일이라고 케익을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 딸이 그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절이 온다. 부모를 사랑하는 아이가 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때가 온다. 아이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 있다면 콩 심은 데 콩이 안 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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