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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신정호 (feat. 부동산 재테크 대실패 이후)

신정호는 애인 아니고 호수 이름

by 민혜숙

남편 : 난 은퇴하면 신정호 근처에서 살고 싶어. 신정호에서 매일 달리고 호수를 바라보면서 파스타 먹으면 좋겠다.

나 : 은퇴 후 주택에 살고 싶단 말이네?

남편 : 신정호는 마라토너의 천국이야. 햇살로 반짝이는 호수를 보면서 달리면 환상적이잖아.

나 : 그렇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그럼 왜 은퇴할 때까지 기다려? 은퇴하기 전에 사면 안되나? 내일 당장 집 알아봅시다!

신정호 옆 주택을 당장!

다음 날 부동산에 전화 걸어 주택을 찾아봐 달라고 하고 만났는데 중개인이 인도한 곳은 전원주택단지. 이미 20여 채가 아름답게 지어져 있고 벌써 입주한 집들도 많았다. 주택 단지 27채 중에 분양 안 된 4채가 남아 있는데 가장 작은 집 35평은 딱 하나 남았다. 건설사 사장님이 오신 김에 계약하고 가라 하셔서 나는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다. 그래서 달리기 마니아 남편의 소원성취는 말한 지 하루 만에 이루어졌다. 바로 집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 부부 부동산 재테크 완전 실패 때문이다.


예산에 이사 오기 전에 인천 송도 신도시 32평 아파트에 1억2천만원에 전세를 살고 있었다. 그 때 은행 대출받아 그 집을 사 두었으면 지금 엄청 부자가 되어 있겠으나, 그 전세금에 돈을 보태서 2013년 지금 사는 분양가 600만 원짜리 아파트를 샀다. 생애 첫 내 소유의 아파트라는 감동이 있긴 했으나 부동산 재테크의 재앙이었다. 2008년에 분양되어 14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집값은 분양가 600에서 거의 변하지 않은 시골 아파트. 전국 최저가가 아닐까 싶다. 전국의 집값이 다 오르고 서울 아파트값은 두 배로 세 배로 뛴다는데 내가 사는 아파트값은 10년 동안 2천만 원 올랐다.


충남 예산에서 10년 동안 열심히 일해 목돈을 마련했는데, 아산시 신창면의 아름다운 신정호 옆에 주택을 사는 것이 그 돈을 유용하게 쓰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 홀로 주택이 아니라 2층집으로 27세대나 모여있는 아기자기한 마을이 형성된 이곳은 주황색 지붕과 크림색 벽이 인상적이었다. 붉은 지붕의 2층 양옥집. 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그려지는 그런 집이었다. 신정호로 마라톤 연습하러 올 때 운전하는 남편은 못 봤지만 나는 왼쪽으로 보이는 저 붉은 지붕의 집들은 뭘까 궁금했었다. 당장 알아본 부동산 중개인이 그 궁금한 집으로 인도할 때 나는 거의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120평의 대지에 건평 35평. 1층테라스와 하늘이 보이는 2층 데크도 널찍했다. 분양가는 평당 천만 원. 바로 사기로 하고 계약서를 썼다. 은퇴하면 아파트 팔고 이 집으로 온다는 계획으로.


사장님은 집을 보자마자 계약하는 나를 큰손으로 보셨는지 천안에 60억짜리 빌딩을 지으셨는데 월세가 2~3천만 원은 나온다고 사라고 하셨다. 속으로 깜짝 놀라 저는 그렇게 부자는 아니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다. 아파트에만 갇혀 있지 않고 마당에서 콧바람을 쐬고, 마스크 쓰고 신정호에 나와 산책을 할 수 있어서 코로나 세월이 견딜 만했다.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꽉 차오르는!

나와 남편 취미는 달리기다. 남편은 이미 풀코스 마라톤 42.195km를 완주했고, 한 달에 누적 200km 뛰는 중급반 러너, 나는 불면증 퇴치를 위해 한번 뛰면 5km 정도 달리는 새싹반 러너다. 신정호는 둘레가 약 5km고 경사가 없어서 마나토너의 최상급 러닝 코스다. 신정호라는 천혜의 훈련장이 있어서 남편과 딸아이가 2019년 릴레이 마라톤에 참가했다. 각각 하프마라톤을 뛰어야 하므로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겨울방학 내내 달리기 연습을 하고, 3월에 대회에 출전해서 완주하는 신통한 일을 했다. 그때 나는 신정호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황량한 겨울 호숫가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면서 30년 전 학교서점에서 산 마종기 시인의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뿐이랴> 라는 시집이 생각났다. 시집 제목은 <밤노래 4>의 1연에 나온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줄 그어 놓았던 시행은 다음과 같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바람 부는 언덕에서, 어두운 물가에서

어깨를 비비며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마른 산골에서는 밤마다 늑대들 울어도

쓰러졌다가도 같이 일어나 먼지를 터는 것이

어디 우리나라의 갈대들뿐이랴.


신정호는 4계절 내내 아름답다. 아산시는 신정호에 심혈을 기울이는 듯하다. 연꽃단지도 만들고 예쁜 다리도 놓고 아름다운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고 있다. 산수유로 시작한 봄이 끝없이 이어지는 벚꽃으로 아프도록 아름다운 붉은 덩굴장미로 끝이 나면 연꽃이 피어난다. 여름의 땡볕을 이겨내고 새벽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 연꽃이 지고 나면 국화가 핀다. 봄부터 가을까지 신록에서 성하의 초록으로 이어지고 낙엽을 드리우는 메타세콰이어 길도 너무 아름답다. 겨울마저도 아름다운데 신정호가 얼어붙고 그 위로 눈이 내리면 설원이 펼쳐지고 눈이 부시다.


4계절 매일매일 달리고 걸을 수 있는 곳. 달리면 몸이 튼튼해지고 걸으면 마음이 충만해진다. 달리면 심장이 뛰고 땀이 솟구친다. 걸으면서 옛날 추억도 떠올리고 속 썩이는 학생을 용서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아버지와 딸을 생각한다. 이제 신정호 없는 삶은 앙꼬없는 찐빵이다.

이런 집을 나만 쓰면 안 되지!

홍대 건축학과 유현준 교수는 이상적인 삶으로 4도 3촌을 이야기했다. 4일은 도시에서 일하고 3일은 시골에서 쉬는 삶. 나는 도시 사람은 아니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 밤까지 아파트에서 지내고 주말은 마당이 있는 삶이 시작되었다. 우리 동네 이름은 돌체비타. 이탈리아 말로 달콤한 인생. 아름다운 인생을 나만 즐기기보다는 함께 즐기는 것이 이 집을 더욱 귀하게 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는 부동산으로 돈 벌 운이 없는 것 같으니. 내가 산 부동산으로 나의 심신의 건강을 얻고 나의 친구와 지인들이 행복하다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를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재테크가 아니라 心테크.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누리는 것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라 믿으면서 돌체비타(달콤한 인생)를 살기로 했다. 하여 나는 주중에 비어 있는 이 집을 지인과 친구에게 늘 열어 놓는다. 신정호에서 위로를 얻고 싶은 분들이 오고 간다. 우선 나의 아버지와 친구분들과 친척 어른들이 묵고 가신다. 여름 휴가로 하루 지내고 간 부부도 있었다. 이번 여름에는 3년 만에 재개된 교회 청년부 수련회를 했고, 여름방학을 맞은 딸아이 친구들이 6명이 몰려와서 20대에 여성들의 신나는 1박 2일을 보내고 갔다. 남편의 마라톤 동호회 친구들도 주말 아침 러닝을 마치고 베이글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간다. 서울의 좁은 원룸에 사는 친구, 소음에 지친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 고기를 구워 먹고, 하룻밤 자고 신정호를 감탄하고 귀가한다. 우리는 데크에서 밤늦도록 술잔도 기울이고 달과 별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이는 나에게 묻는다. 그렇게 개인 공간을 타인에게 항상 오픈할 수 있냐고. 나는 SNS에 먹고 입고 보고 사고 즐기고 하는 거 다 보여주고, 자신의 감정까지 소상히 쓰면서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은데, 집을 보여주는 게 무슨 대수냐고 한다.


가을이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다. 황금 들녘의 노란 빛은 심장이 녹아내릴 만큼 강렬하고 단풍나무는 진홍의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10월의 마지막 주일에는 우리 집 마당에서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아니지만 잘 알고 지내는 신부님과 성공회 교회 교인들이 마당에서 야외예배를 드린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신정호를 산책하면서 감탄을 하고 간다면, 우리 집이 집값을 해서 좋다. 감사와 감탄은 인생을 잘살고 있는지 알아보는 2개의 측정기라고 한다. 신정호에 오면 사람들은 저절로 감탄하게 된다. 시야를 꽉 채우는 큰물과 나무와 꽃이 주는 힘이 대단하다. 자연을 보고 감탄을 하다 보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도 슬며시 마음에 차오른다. 신정호야, 정말 너 없이는 내가 못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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