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에 나는 뉴질랜드 이민자로 북섬에 있는 대도시 오클랜드에 살고 있었다. 뉴질랜드 이주 전, 싱가포르에 살 때 싱가포르 주재 뉴질랜드 영사관에서 기술 이민신청 했다. 내가 영사님에게 남편 회사계약이 끝나면 한국에서 다시 신청해서 진행하면 1년도 더 걸리니 싱가포르에서 빨리 끝내 달라고 청했더니 착한 영사님이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해서 영주권이 3개월 만에 나왔다. 이 신속한 일 처리가 행운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뉴질랜드가 나를 부르는 줄 알았다. 너무 순탄하게 영주권을 받은 것이 좋은 징조라고 믿고 이주했으나 직업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고 뉴질랜드 억양의 영어를 이해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 이민을 포기하고 소위 역이민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서점에서 뉴질랜드 풍경을 담은 사진첩을 보면서 뉴질랜드 남섬의 아름다운 자연을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산을 트래킹을 하기에는 아이가 너무 어리고 돈도 없고 해서 그냥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이어서 여행이고 뭐고 마음은 뒤죽박죽이었다. 귀국 후 뉴질랜드는 나에게 아픈 추억이고 오세아니아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못 보고 온 남섬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이번 가을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딱 20년 만에 뉴질랜드로 날아갔다.
무한한 아름다움 infinite beauty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 산맥을 건넌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퀸즈타운에서 밀포드 사운드(피오르드 해안)에 가기 위해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을 횡단해야 하는데 보통 버스로 가면 왕복 9시간이고 비행기로 가면 왕복 70분이었다. 자유여행으로 떠나면서 여행사에서 항공권과 교통편에 대해 지불해야 했는데 여행사가 실수로 밀포드 사운드 여정을 빼먹은 것이다. 뒤늦게 버스 예약을 하려니 예약이 불가능했고 할 수 없이 비용을 더 내고 비행기를 타기로 했는데 이게 ‘대박’이었던 것이다. 여행사 직원의 절묘한 실수는 감사한 일이었다.
비행기는 하늘로 올랐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것은 비현실적인 꿈같은 아름다움이었다. 사람의 눈높이가 변하면 사물이 이렇게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산꼭대기에만 올라가도 마음가짐이 변하는데 하늘에 오르니 모든 것을 다 품을 만큼 마음이 넓어졌다. 어제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바라보던 거대한 호수 와카티푸 호수가 손바닥만 하게 보인다. 산봉우리에 흰 눈이 옆집 친구처럼 가까이서 손을 흔든다. 깎아지르는 듯한 산들 사이로 강이 흐르고 구름과 눈부신 하늘이 교차하며 내 눈을 황홀하게 했다.
케이블카를 탄 것보다 훨씬 높고, 스카이다이빙보다 안전하게 하늘에 올라 사람의 흔적이 없는 대자연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얻은 행운 중에 가장 큰 행운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부모님의 사랑이나 신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무한하다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가능하지 못하고 그냥 추상적으로 말한 것이었다. 크다 넓다 깊다는 말을 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무한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미셸 투르니에는 <생각의 거울>에서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다르다고 했는데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아름다움은 유한하며 조화롭다면, 숭고함은 무한하며 역동적이다. 아름다움은 신적인 무상성을 환기시키고 숭고함은 도덕적 종교적 개념으로 귀결한다’라는 그의 구별에 동의한다. 이 무한함으로 다가오는 자연은 아름답다기보다 숭고해 보였다. 두려움과 전율을 주었고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퀸즈타운의 정원에서 본 장미꽃과 큰 나무들이 아름다움이라면 비행기에 아래로 보이는 저 높은 산과 바다는 숭고함이었다. 그것은 욕심으로 비대해진 나의 마음을 비우라는 도덕적 명령과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종교적 신념으로 나를 이끌었다. 배를 타고 밀포드 사운드의 피오르드 해안에서 솟은 봉우리와 폭포는 산맥과 계곡을 바다 위에 올려놓은 것 같았다. 100 미터가 넘는 폭포수 앞에서 배가 섰을 때 들이치는 물살은 숭고함이 물질이 되어 나를 때리는 듯했다.
분명한 행복 definite happiness
투르니에가 말한 아름다움을 퀸즈타운의 자랑인 퀸즈타운 가든에 가서 만났다. 분홍 노랑 빨강 흰색 장미들이 탐스럽게 풍성하게 피어나 있었다. 장미가 얼마나 큰지 한 송이 어루만져 보았다.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수채화로 장미를 그릴 때 안쪽은 진하게 바깥쪽으로 갈수록 연하게 물은 더해가며 그려나가느라 수백 개 장미를 그려본 것 같다. 그렇게 수만 개 장미는 진한 중심에서 연한 주변으로 꿈같이 부드럽게 피어나 있었다. 꽃들을 호위하듯 나무들이 서 있는데 나무들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너무 커서 그 아래 벤치도 있고 100명의 어린이가 앉아서 수업을 들어도 될 만큼 컸다. 미국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만났던 세쿼이아 나무들 같았다. 나무를 껴안고 만져보고 사진을 찍어보니 내가 껌딱지 같았다. 이 푸르름의 한 가운데 서서 하늘로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러보았다. 이 행복감이 어디서 오는가 생각해 보면 저기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남편과 내 옆에서 웃고 있는 딸과 함께 이룬 가족이라는 이름에서 온다는 확신이 들었다.
남편은 말했다. 혼자 여행하는 건 아무래도 심심할 거 같다고. 방향감각이 전혀 없고 길치라서 혼자 어디를 다니면 매우 비효율적인 나를 남편과 딸이 길을 인도할 때, 나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챙기면서 가족의 분업화를 이루었다. 우리가 얼마나 의존적인 존재들인가 확인하면서 다니는 여행은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나에게 모국어를 쓸 수 있는 조국이 있어서 이 불편한 영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이 감사와 행복감은 이다지도 큼지막하고 푸르르고 평화로운 정원에서 아름다움이 주는 선물이다.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어떤 의무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어떤 제재도 없이 그저 바라보고 즐기며 놀아도 되는 이 순간은 장미와 나무들이 주는 축복이었다. 아름다움은 분명한 행복을 아는 여행자로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