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딜 때는 설렘과 두려움이 있다. 설렘이 두려움을 이길 때 그 세계로 들어갈 용기가 생긴다. 나는 올해 2월 개신교 교회를 떠나 성공회교회에 정식으로 교인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2022년 한 해 동안 신부님이(성공회교회에서는 목회자를 목사님이 아니라 신부님이라 부른다) 나에게 많은 책을 읽게 해 주셨다. 성공회 교인이 되기 위해 나는 지난 1년 동안 주중 오전 시간에 신부님과 만나 신앙이나 나의 인간관계에 고민 이야기를 나누며 신부님과 친근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이면 신부님이 ‘이 책 한번 읽어보세요’,라고 하며 성공회, 동방정교, 카톨릭, 개신교 등 다양한 저자들의 책을 소개해 주셨다. 많은 책 중에 가장 마음에 와닿은 책은 로완 윌리엄스의 <제자가 된다는 것> 이었다. 신부님은 전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반가워서 책을 소개해 주셨다.
요즘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과 유튜브가 책을 집어 삼켜버리더니 챗GPT라는 것이 나와 책이 더 설 자리가 없어진 것 같다. 이런 와중에 성공회 교회에 있는 종교 서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 테니 그래서 나에게 열심히 책을 권해 주셨으리라 추측한다. 만약에 신부님이 성공회 교회로 나오라고 했다면 나는 당장 발길을 끊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책 읽고 차를 마시다 보니 왠지 이 작은 교회로 하느님이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탕하고 기지 넘치는 문체로 돈이 없어도 책을 읽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준 분은 고미숙 작가님이다. 작가님은 도서관에 도시락 싸가지고 가서 책 읽고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나 도시락 싸가지고 갈 도서관은 주변에 많지만, 같이 책을 읽을 친구는 많지 않다. 고미숙 작가님은 우정과 지성을 이렇게 정리했다.“지성 없는 우정은 지루하다. 우정 없는 지성은 썰렁하다.”
나는 교회와 세례와 예배의 의미에 대한 책을 읽고 도시락을 싸가지는 않았지만, 신부님과 가끔은 식사까지 하는 일대일 엘리트 코스 과외를 받은 셈이다. 책이 매개되어 고미숙 작가님 표현처럼 지루하지 않고 썰렁하지 않은 우정이 생겨났다. 한편 신부님과 편안히 이야기 나누고 있는 장소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충남 예산군의 이 성공회교회는 1917년에 설립되었지만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인 2017년에 문을 닫았는데, 그 불 꺼지고 잡초가 우거진 교회를 살려보겠다고 신학교 친구들과 어지러운 마당을 정리하고 전기도 없는 성당에서 촛불을 켜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부님은 2018년부터 문 닫은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5년 정도의 시간 동안 영혼과 몸을 교회에 갈아 넣으셨음이 틀림없다.
이 유쾌하고 문학적인 신부님은 지역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독서모임과 영화감상 모임을 만들고 교인이 아니어도 문화적인 나눔을 위해 교회에 사람들이 오도록 했다. 틈틈이 조금씩 돈이 모여질 때마다 폐허가 된 교회를 고쳐 나갔다. 그런 노력이 지금 작은 규모이지만 교우들이 사랑을 나누고 몸담고 싶은 공동체를 탄생하게 했다. 기독교가 쇠락하는 21세기에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적같이 불을 다시 밝힌 이 교회에 한 일원이 되면서 나는 영적인 모험을 시작했다. 부모님 세대부터 개신교 교회를 다니다가 예배의 방식이나 전통이 다른 성공회교회로 교회를 바꾼 것은 큰 변화였다. 신부님은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선교사의 마음으로 예산에 오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도 개척자가 되어 보는 게 어떠냐고 하시면서 대학원에서 선교에 대한 공부도 해보라고 하신다. 나는 내가 더 공부할 그릇이 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또 한편 성공회라는 새로운 세계를 더 세밀히 알고 싶은 마음도 있다.
위대한 프랑스 화가처럼 나도
며칠 전 한가람 미술관에 앙드레 브라질리에 전시회를 보러 갔다. 교회나 성당 사찰 같은 종교적 시설과 미술관은 매우 비슷한 면이 있다. 일단 얼굴에 화장을 벗듯 여러 가지 사회적 자아에 따라 갈아입었던 옷을 벗고 나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다. 시끄러운 잡음이 사라지고 조용한 가운데 아름다운 빛과 색들이 눈으로 들어온다. 소스나 강한 양념을 넣지 않고 먹는 음식이 담백하고 맛있는 것처럼 불필요한 장식과 자극을 벗겨낸 곳이라는 점에서 미술관과 성소는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미술관에서 성스러움을 느낀다. 앙드레 브라질리에는 미술의 성스러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조형적 개념의 정직함, 삶과 자연에 대한 사랑, 영적인 모험.
나는 그것들을 굳게 믿고 있어요.
그가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조형적 정직함은 완전한 추상으로 넘어가지 않고 범인의 눈으로도 단박에 회화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앙리 마티스 같은 야수파 화풍이지만 사물이 더 명확히 묘사되어 있었다. 나는 이 구상의 세계가 양념으로 물들지 않은 본연의 음식처럼 회화의 가장 진수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의 정직한 목소리는 철학과 설명으로 머리가 커진 현대 미술보다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정교하고 복잡한 언어로 인간을 설명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따뜻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아니던가. 조형적 정직함은 성공회 작은 공동체의 단순하고 편안했던 느낌과 와닿았다. 삶과 자연에 대한 그의 사랑은 곧 신에 대한 찬미로 여겨졌다. 그에게 그리는 행위는 삶의 기쁨이자 찬양이었다.
앙드레 브라질리에가 그가 살던 프랑스 소뮈르 지역의 아름다움, 강가나 호수를 달리는 말과 사랑하는 아내 샹딸을 그리면서 영적인 모험을 했다면, 나는 성공회 교회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배움과 나눔의 길에 들어섰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새 연필과 새 지우개가 들어있던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 새 공책에 내 이름을 적을 때 같은 미세한 떨림이 있다. 이건 다 신부님이 주신 책과 신부님이 우려주었던 허브차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