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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Jan 30. 2023

뉴질랜드 남섬 자유여행 (6회중 4회)

마운트쿡은 죽기 전에 보고 싶은 산

마운트 쿡을 향해


아침에 일어나 계란후라이까지 해서 풍성히 먹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가이드님이 오셔서 우리를 데리고 마운트 쿡으로 향했다. 3시간짜리 트래킹을 해본다는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가이드님은 건장하고 키가 크신 중년의 남성분이었다. 알고 보니 남편과 같은 학번이었다. 잘생기고 키 크고 흰머리가 멋진 중년의 남성이라는 말은 밀포드 사운드로 우리를 데려가 준 경비행기 기장님, 어제 언슬로우 증기선 선장님과 오늘 마운트쿡까지 가는 여행가이드님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비행기, 배, 자동차를 모는 남성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머리가 은빛이 되어 가면서 멋진 모습이 되어 간다. 나이 들면 외면의 아름다움은 사라질지라도 내가 느끼는 내면의 안정감과 지혜와 지식은 젊은 시절보다 나은 것 같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화려한 도시의 인공물보다 무한한 자연을 더 갈망하게 된다. 늙음은 자연으로 가까이 가게 한다.    

 

가이드님은 어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오셨다고 한다. 전날 댁에서 퀸스타운까지 운전해와서 호텔에서 하루 주무셨다고 했는데, 크라이스트처치에 가기 전까지는 얼마나 멀리서 오셨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여행사 설명만 들었을 때는, 가이드님이 그냥 마운트쿡을 들러 크라이스트처치로 데려다주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또렷한 발음으로 상세하게 천천히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시는 베테랑 가이드님이었다. 우리는 아침 8시30분에 떠나 깁스튼 밸리 Gibbston Valley로 갔다. 세계 최초로 번지점프가 시작된 장소에 가서 번지점프 장면을 보았다. 환호성이 들렸다. 번지점프 장소를 실제로 보니 나는 진정 번지점프는 못할 것 같다. 이 곳은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다. 화장실 표시에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있고 크리스마스 트리마져 천장에 붙어서 거꾸로 매달려 있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깁스튼 밸리를 지나 마운트 쿡까지 가는 길은 끝없는 초지로 이어졌다. 남섬에 와서 처음으로 소와 양 떼를 보았다. 소는 검은 소들이었고 메리노 양모를 만드는 메리노양은 색이 밤색에 가까왔다. 큰 스프링클러가 물을 뿌리면서 바퀴를 이용해 전진하고 있었는데 사막기후인 이곳은 비가 오지 않아서 이런 시설이 필요하다고 한다. 소와 양이 먹을 풀을 재배하려면 이렇게 관개시설이 필요한데 물값은 공짜라고 한다. 빙하가 녹아 내려오는 물로 수력발전을 해서 그렇다고 한다. 빙하가 다 녹아버리면 어쩌나. 25년 후에는 여름철에 마운트 쿡에 만년설이 다 녹아버린다는데.      

평화로운 초지에 피어있는 보라색 꽃은 라벤더 비슷했는데 루핀 lupine 이라는 꽃이었다. 들에 이렇게 흐드러지게 피어나다니.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아래 푸른 초장에 보라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하다. 언덕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제주도의 오름과 비슷했다. 관목이 듬성듬성 자라고 나무가 없는 넉넉한 곡선의 언덕 아래 포도나무도 자란다. 뉴질랜드는 화이트 와인이 유명하다고 한다.  레드 와인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으나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 넓디넓은 목장에도 포도원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주인장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미국을 여행할 때는 히스패닉 노동자들이 차를 줄지어 주차하고 사과밭이나 오렌지밭에서 일하는지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주차된 차들은 보았었는데 여기는 모든 것이 원격으로 되는 것 같다. 아까 본 거대한 문명의 이기인 스프링클러도 있어서 그런가 보다. 콜리라는 개들이 양을 돌보고 있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선한 목자는 어디에 있는가? 기계가 다 대체하고 있는 것 같다. 저 소들은 마블링이 없어서 건강에 좋을 소들이고. 호주에서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마블링을 위해서 출하하기 전 3달 전부터 축사에 갇혀서 살을 찌운다고 한다. 왜 우리는 지방이 살보다 더 많아 보이는 허연 쇠고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건강하게 방목되고 있는 소들은 한우들보다 행복해 보였다. 뉴질랜드의 사람들이나 가축이나 우리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인간에게도 사람에게도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 같아 보여 부러웠다.     


길을 달리다 보니 하늘색 눈부신 물빛의 호수가 보인다. ‘밀키 블루’라고 하는 이 호수는 빙하가 녹아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서양사람들은 정말 우유를 좋아하나 보다. 스카이 블루가 아니라 밀키 블루라니! 아마도 은하수에 해당하는 밀키 웨이와 비슷하게 지은 이름이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물빛이 정말 하늘빛과 같다. 물과 하늘 사이에 넓은 땅이 있어서 두 푸르름이 나누어져 있어서 물과 하늘이 구별되 보였다. 푸르름 푸르름 무한한 푸르름이다.     

물이 굉장히 불투명해 보여서 마치 유화를 보는 듯했다. 유화 물감을 두껍게 바른 듯한 물빛이 푸른데 물가엔 노르스름한 갈대가 피어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산 정상에는 만년설이 보인다. 이렇게 넓고 넓은 호숫가에 아무도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목장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남섬의 인구는 고작 1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광활할 땅에 아무도 없다. 인구밀도가 낮은 곳에 오면 대학에 가느라, 좋은 집 장만하느라, 좋은 직업을 갖느라, 어마어마한 삶의 에너지를 쓰고 있는 과열 경쟁 사회에 대해 회의가 밀려온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생식을 포기하고 새끼를 낳지 않는다는 쥐 실험처럼 우리 청년들의 결혼과 출산을 안 하는 이유는 모두가 대기업 공기업에 가거나 의사 변호사가 되고자 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작은 회사에 들어가도 지방에 살아도 근사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큰 회사와 큰 도시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길 수 있기를.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마운트 쿡에서 트래킹

11시 좀 넘어서 카페에 들러 샌드위치와 랩과 키쉬를 먹으면서 점심을 대신했다. 마운트 쿡에 도착하기 전부터 멀리서 보이는 만년설의 봉우리들은 압도적이고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멀리 보이는 산을 뒤로하고 사진을 찍었다. 가슴이 너무 설레고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퀸스타운을 떠난 지 4시간 만에 산 아래에 도착했다. 오후 12시 30분. 우리는 10km가량의 3시간짜리 후커밸리 트래킹을 시작했다. 단체패키지 관광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멋진 트래킹을 시작했다. 너무 늦지 않기 위해서 빠른 걸음으로 시작했다. 눈 덮인 산이 내 눈에 들어왔을 때 마치 3D 영화나 VR에서 보는 모습 같았다. 이것이 현실인가! 이것이 실화냐! 너무나 웅장하고 입을 다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이런 자연이 있기에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를 찍을 수 있었나 보다. 트랙킹 길을 땡볕이었고 먼지도 많이 날렸다.     

 

날씨가 너무 청명해서 우리는 항상 산정상에 계속 머물러 있는 흰 구름과 푸른하늘의 대조를 만끽하며 걸을 수 있었다. 밀포드 사운드에 갈 때도 퀸타운을 산책할 때도 화창한 날씨는 계속되었는데, 오늘 트래킹하는 날까지도 맑은 날씨는 정말 환상적이다. 여름이라 눈부시게 청명한 날씨다. 햇살이 작열하지만 선선하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졌다. 의사 조력자살이 허가된 나라가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정도라고 알고 있다. 스위스에는 자살 여행이라는 것이 있는데 부자들이 융프라우를 바라보면서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나는 마운트쿡이 융푸라우 만큼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했다. 죽기 전에 가장 마지막 순간에 보고 싶은 자연의 모습. 마운트쿡은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후커밸리 트래킹 코스에는 현수교가 총 3개 있었는데 건널 때마다 너무 무서웠다. 쿵푸팬더나 액션 영화에서 늘 현수교에서 격투가 있고 현수교가 끊어지고 아래 물로 추락하는 주인공이나 악당들 생각이 나서 다리가 출렁일 때마다 내 심장을 부여잡고 싶었다. 정상의 호수에는 1시간 10분 만에 도착했다. 매우 빨리 걸은 결과였다. 튼튼한 우리 가족!     


정상에 올라 호수를 바라보니 와우. 세상에!!!  빙하가 녹은 덩어리가 조형물처럼 조각상처럼 떠 있고 약간 푸른 빛을 띤 불투명한 빙하수가 콸콸 흘러 내려온다. 세린이는 물이 사골 국물 같고 바위들이 고깃덩어리 같다고 한다. 와 먹는 것에 완벽한 비유였다. 이건 정말 현실 같지 않았다. 현실 같지 않은 이유는 너무나 뜨거운 햇볕 아래 하얀 눈이 덮인 산이 있는 초현실적인 대조가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계곡을 흐르는 광대한 물살이 색이 파란색이 아니라 아주 연한 민트색이라는 점이다. 색을 왜곡해서 그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나 나올 듯한 색이다. 그 색에서 나오는 소리가 귀를 쩌렁쩌렁 울린다. 엄청난 양의 물이 흘러내려 간다. 저 물의 힘이 뉴질랜드 농업 등 산업에 필요한 전기를 만든다고 한다.    

 

사진을 많이 찍었다. 동영상은 학철씨가 많이 찍었다. 이 환상적인 자연을 다 담을 수는 없지만. 물에 손을 넣어보니 꽤 차다. 도저히 수영할 수 없는 온도다. 녹은 빙하는 거무스름해서 바위처럼 보였는데 점점 녹고 있는 것 같다. 호수에서 한참을 지내고 우리는 다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가이드님에게로 돌아왔다. 올 때는 시간 여유가 있어서 천천히 걸으면서 풍경을 돌아보았다. 돌아온 시간은 오후 3시 30분. 우리 가족은 3시간 만에 10km의 트래킹을 마쳤는데 집에 가기가 아쉬웠다. 뭔가 조금 아쉽게 끝나는 것이 여운이 길다. 조금 아쉬운 게 오히려 행복인지도 모르겠다. 이 아쉬움 때문에 마운트 쿡에 언젠가 다시 올 것 같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다시 온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여기에 동전을 던지지 않았지만 내 마음 한 조각을 놓고 가는 것 같다. 다시 온다면 여름이 아니라 봄에 와 보고 싶다. 뜨거운 태양은 덜 뜨겁고 만년설은 더 많이 보일 것이라는 계산이 맞는다면. 아무튼, 아쉬운 이별이었다.     

테카포 선한목자 교회

트래킹을 마치고 크라이스트처치로 가면서 ‘테카포’라는 작은 마을을 들렀다. 여행 책자에 보니 이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여행지로서는 매우 유명한 곳이었다. 선한목자 교회 Good Shepherd Church라는 이름의 성공회 성당이었다. 문이 닫혀 있어서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20여 명밖에 수용이 되지 않는 작고 고요한 석조 건물의 교회였다. 이 교회 주변의 호수와 루핀이 핀 들판은 절대적으로 아름다웠다. 지금이 여름이니까 이렇게 좋은데 겨울엔 어떨까 상상해 봤다. 뉴질랜드에 이민 오기 전에 답사 올 때 계절이 여름이라면 모든 사람이 무조건 이민을 오겠다고 결정할 것 같다. 우리는 이민 올 때 답사조차 하지 않았다. 참 용감했던 나와 학철씨의 젊은 날이었다.      


교회 옆에는 양치기 개의 동상이 높이 솟아 있었다. 개 없이는 양치기가 불가하니 이 나라 사람들이 개를 동상으로 세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상의 개는 푸르른 하늘을 향해 약간 고개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건강하고 충직해 보였다.     

 

크라이스트처치 도착

우리는 계속 크라이스트처치를 향해 달려갔다. 차 안에서 가이드님과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이민 처음 오셔서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개인택시를 운전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홍세화 작가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이 떠올라 말씀드렸더니 이미 읽으셨다고 한다. 알고 보니 엄청난 독서가셨다. 뉴질랜드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도 꿰차고 계셨다. 운전사로서 처음에 무전으로 들리는 영어와 취객의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서 많이 고생하셨다고 한다. 한 2년 지나니 익숙해졌다고 하시는데 나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말하는 키위 영어도 잘 몰라 들어서 맘고생을 했었다. 택시비 떼어먹고 도망가는 대학생들도 많았다는데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백인들이었음이 틀림없다. 2010년대 이후 조기 유학이나 이민이 줄어들자 한인 교민사회가 축소돼서 한인을 상대로 하는 사업이 아주 어려웠을 텐데 택시업은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2011년과 2012년에 걸친 대지진에도 불구하고 크라이스트처치를 떠나지 않고 27년의 이민 생활을 이어온 가이드님의 삶에 존경을 보내고 싶었다.     


Ashburton 이라는 작은 도시에 편의점에서 카페라테를 한잔과 샌드위치를 샀는데 라테가 너무 맛있었다. 드디어 저녁 8시가 조금 넘어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했다. 도시로 들어서면서 도시 외곽의 공장과 창고들이 즐비한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퀸스타운에서 받은 인상과 전혀 다른 스산하고 약간은 지저분한 느낌이 들었다. 이 도시가 2011년과 2012년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아직도 재건되지 않아 건물 외벽에 그라피티가 있기도 하고 버려진 듯한 건물도 보였다. 숙소가 중심가에서 아주 가깝다고 하는데 중심가를 벗어나자마자 이런 풍경이 나오다니 약간은 실망이 되었다. 여하튼 퀸스타운에서 떠난 지 거의 12시간 만에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했고 저녁이 되니 낮 동안의 그 뜨거운 햇살은 어디로 갔는지 바람이 몹시 불고 추웠다. 얼른 호텔로 들어갔다.     


‘브레이크 프리’라는 호텔은 ‘주시 스누즈’ 호텔보다 훨씬 좋은 호텔이었다. 저녁 식사를 퀸타운에서 사서 가지고 온 음식으로 대충하고 긴긴 트래킹으로 지친 몸을 쉬었다. 이 호텔은 신기하게 다리미와 우리집에 있는 것과 크기가 같은 대형 다리미대가 있어서, 다리미대를 식탁으로 위에서 음식을 놓고 먹을 수 있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아니라 다리미대위의 저녁 식사였다.   

  

침대에 누워 가이드님이 하신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중국 유학생과 결혼한 따님은 아이를 낳아 손자가 벌써 7살이고, 공부 안 하는 큰 형님 아들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 서울에 대학 보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택시 운전 시작하고 고생한 이야기, 대학생들 택시비 떼어먹은 이야기. 이 나라는 의대에 입학해도 10%만 의사가 된다는 신기한 이야기, 집 한 채만 있으면 누구와 비교할 것 없이 잘 살 수 있는 뉴질랜드라고, 부부가 월 230만원 연금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크라이스트처치 물가가 너무 비싸서 의료 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의료비가 다 무료라 해도 그 돈으로 두 사람의 생활을 위해서는 아주 충분치는 않겠구나 싶었다.

     

백인이 제1 시민이라면 마오리 원주민은 제2 시민이고 나 같이 영어가 모국어도 아니고 아시아인은 제3 시민이었다. 중국 기업인 마윈의 동영상에서 본 내용이다. 20대는 좋은 상사를 찾아서 배워야 하고 50대는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경험을 나눠주어야 한다고. 나는 지금 지식과 경험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있는데 그나마 외국어를 쓰지 않고 모국어로 한국에서 살아남아서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건사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 이외에 내가 타인을 돕고 세워주고 있다는 느낌은 요즘 나에게 매우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 되었다. 가이드님은 한국인이 별로 없는 초기 크라이스트처치에서 30대의 젊은 나이부터 지금까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엄청난 독서를 하며 아이들을 키워내시고 나 같은 관광객에게 삶의 이야기를 통해 감동을 주시고 있다.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아는 눈으로 파이니스트들의 연주를 보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이민 사회를 조금 경험한 나는 가이드님의 삶이 얼마나 끈질긴 노력이 필요했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그 분은 우리 여행에 엄청난 정보와 감동을 더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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