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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Jun 09. 2023

아이들 눈빛으로 먹고 삽니다

그것은 운수대통

나: 얘들아 너희들 대학에서 어떤 전공을 하고 싶은지 정한 사람 있어?
 서진 :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 정말 모르겠어요.

나 : 그럼 일단 수학 과학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학을 전공하는 건 어때? OO공학이라는 여러 전공이 있는데 OO 안에 어떤 단어를 넣을 수 있을까?
 시현 : 남녀공학이요!!!     


눈으로 말하는 아이들

시현이 말우리 모두 빵 터졌다. 함께 웃을 수 있는 이 순간에 나는 선생님으로서 더없는 행복을 누렸다. 이 노루나 사슴 새끼처럼 생기발랄한 생명체들과 함께 있다는 것도 나에겐 큰 행운인데 이 녀석들이 나를 웃겨 준다. 이 여학생들의 눈망울은 깊은 호수 같아서 내가 풍덩 빠질 것 같다. 정말 사슴 같다는 말이 딱 맞다. 문제를 풀고 숙제 검사할 때는 아이들이 나와 눈을 마주칠 일이 없지만, 대학에서의 전공이나 고등학교 진로에 관해 이야기 나누면 서로 눈을 바라보게 된다. 이 아이들 눈빛이 나에게 힘을 준다. 남녀공학이 이렇게 귀여운 중학교 2학년 여학생 머리를 가득 채운 이유는 우리 지역에는 남녀공학 학교가 없어서 그렇다. 중학교 고등학교 다 남학교 여학교로 나뉘어 있어서, 내가 가르치는 중학교 여학생들의 꿈은 우리 동네를 벗어나 옆 동네에 있는 남녀공학에 가는 것이다. 남녀공학의 꿈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데 이 시골 동네는 버스도 잘 연결이 안 되고 부모님이 통학 매일 시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 그렇다. 그래서 그냥 우리 동네 여자고등학교로 대부분 진학한다. 남녀공학의 꿈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고 다독이는 것이 나의 일이기도 하다. 사실 아이들은 엄청난 고민거리이지만 나는 어딜 가나 노력하고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으므로 어딜 가더라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남녀공학이냐 여학교냐 하는 인생의 중대한 결정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아이들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나는 오후의 피로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오후 3시 정도가 되면 엄청난 피로가 엄습한다. 그냥 누워버리고 싶어진다. 점심밥을 먹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4시부터 시작하는 수업준비를 할 때면 아 오늘도 밤늦게까지 어떻게 수업을 하나 걱정이 앞서고, 아 빨리 은퇴해서 무한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막상 수업을 시작하고 아이들이 뿜어주는 눈빛을 보면서 수업을 해 나가면 나는 점점 힘이 난다. 이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아마도 잠에서 깨어난 지 8시간 정도 지나면 졸음이 온다는 생체리듬 이론이 맞을 것이다. 오후 3시가 잠에서 깬 지 8시간 정도 되는 시간이긴 하다. 그런데 저녁에서 밤으로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 정신이 더욱 말똥말똥해져 커피를 마신 것처럼 완전한 각성 상태에 이르는 것을 보면 아이들이 주는 에너지가 나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 에너지는 마치 햇빛, 물, 공기와 같다. 얼마 전 제주도 강정마을 공동체에서 사는 분들의 인터뷰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중 한 분이 한 말이 인상 깊었다. 그분은 나이 지긋한 여성분이었는데 강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햇빛, 물, 공기만 있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 분의 말처럼 나는 학생들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다. 학생들은 나에게 햇빛, 물, 공기 같은 존재들이다. 물론 과외 수업을 통해 수입이 생기지만, 돈과 상관없는 모든 가르치는 행위는 나에게 힘을 준다. 자원봉사든 동아리 모임이든 모든 수업이 나는 좋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이유가 <중력과 은총>이라는 수필에 ‘모든 것은 중력의 법칙을 따르지만, 신의 은총만예외다’라는 통찰을 읽을 수 있다. 중력의 법칙 즉 아래로 내려가는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어 위로 오를 수 있는 것이 은총이라면, 오후 3시 중력의 영향으로 바닥에 떨어진 내 영혼이 밤늦은 시간이 될수록 비상하는 것은 내 힘이 아니고 신에 힘에 의한 것이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나의 공로와 전혀 상관없이 값없이 주어진 행운이고 선물이다. 영어로 기프트 gift 가 선물과 재능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현상은 능력개발이나 교육의 힘이라기보다는 하늘이 준 중력 법칙의 예외로서의 선물이라고 느껴진다.     


값없이 주어지는 학생들

내가 영어 과외선생이 된 것은 남편 덕이다. IMF 경제 위기 때 남편 회사가 부도난 것도 남편이 싱가포르에 취업이 돼서 적도의 나라에 가게 된 것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싱가포르에서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치는 기회가 생기면 어디나 달려갔다. 한인 학교, 특례입학 학원, 한국어 강의가 필요한 한국기업, 현지 여행사. 싱가포르에 사는 인도 중국인 학생의 집으로 찾아갔다. 실패로 여겨지던 일이 나에게 영어를 배우는 기회를 주었다. 어학연수를 가거나 학원 다니면서 교육비를 지불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벌면서 영어를 배웠다. 나의 학위 중도 포기와 남편 회사 부도라는 실패의 물결을 타고 헤엄치다가 과외선생이 되었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 많은 자기계발 강사들이 인생엔 성공과 실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과정이 있다고 말한다. 나도 그분들 말처럼 실패는 또 하나의 기회였다고 아이들에게 자신 있게 말해준다. 실패처럼 보이는 과정을 겪다 보니, 비효율적인 것은 참지 못하고 항상 꼬치꼬치 따지며 말이 많은 나의 더러운 성격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쪽으로 변한 것 같다.      


아이들 말을 잘 들어주고 내가 스스로 즐거워하는 수업을 하다 보니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나는 과외선생으로서 학생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부방 원장님의 자녀를 가르쳤는데, 원장님이 나에게 당신의 학생들이 중학생이 되면 학생들을 묶어서 나에게 매년 보내주신다. 학생들을 2~3명씩 묶어서 새해가 시작하는 1월이나 학기가 시작하는 3월에 수업을 하도록 꾸려주신다. 수업 시간과 요일까지 상의해서 정할 수 있으니 황송한 일이다. 과외선생이 학생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 원장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나를 만나지 않고 전화 상담으로도 자녀를 보내주신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서울의 명문대나 의대에 진학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진학 결과를 보고 나에게 자녀를 맡긴다기보다, 공부방 원장님이 수년간 열심히 가르친 공로를 인정하고, 그 원장님이 믿는 과외선생이니까 보내주신다고 생각한다.    

  

코로나라는 대전염병의 시대에 태어난 모든 비대면 문화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인터넷 강의가 주는 시간과 돈의 효율성을 완전히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과외선생으로서 다행한 일이다. 여전히 학생들은 선생님과 쌍방의 대화를 원하고 들을 귀 있는 선생님을 원한다. 어린 학생들일수록, 공부를 버거워하는 학생들일수록 교육은 비대면보다 대면이 우세하다. 나에게 과외 수업은 밥벌이로서 노동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로부터 내가 사랑받는 관계의 힘이다. 나에게 수업은 중력과도 같이 무겁고 지치게 하는 대학진학이라는 목표에도 불구하고 위로 상승하게 하는 힘으로 바꾸는 선물이다. 이 선물을 매년 받을 수 있는 나는 운수대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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