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 :(기운이 없는 표정으로) 선생님 문장의 5형식 이거 너무 어려워요.
나: 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근데 성현이는 뭐 할 때가 기분이 좋아?
성현 : (더욱 기운 없는 표정으로 ) 저는 공부할 때 빼고 다 행복해요.
나 : 애휴. 문장의 5형식 땜에 우린 엄청 불행해졌네.
뛰어야 하는 아이들
올해 3월에 성현이와 수업을 처음 시작했다, 5월부터 마스크를 벗고 수업을 하면서 성현이의 전체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 되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단박에 사랑에 빠져버릴 얼굴이었다. 안경을 닦으려고 안경을 벗었을 때는 나는 잠시 넋을 놓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이 얼굴이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즐거운 상상도 했다. 이 잘생긴 얼굴이 요즘 조금씩 구릿빛으로 변하고 있다. 매일 태양을 받으며 야생마처럼 중학교 운동장을 질주하며 축구를 해서 그렇다. 3월부터 운동장에서 뛰어놀아 가무잡잡해진 얼굴은 야생의 빛을 담고 있다. 이렇게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현이는 성실하게 숙제도 잘하고 영어 실력도 좋지만, 문장의 5형식 같은 재미없는 영어 문법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공부를 이렇게 잘하는 친구가 공부할 때 빼고 다 행복하다니 선생님으로서 어찌해 주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맨발로 뛰는 뇌>를 쓴 존 레이티 임상 정신과 의사는 우리의 유전자가 5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새로운 것을 포용하고 트인 공간에 살아가는 것을 갈망하는 호모사피엔스에게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원하는 감정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 감정을 공감 능력이라고 하고 싶다. 나도 배가 고프지만, 친구도 배가 고프니 서로 연대하고 협동해서 사냥하고 먹을 것을 나눠 먹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을 것이라 상상이 된다. 5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전자가 크게 바뀌지 않아서 우리 유전자는 음식이 몸에 적게 공급되는 걸 대비하여 지방으로 몸에 저장하기 때문에 비만이 생기고 다이어트 산업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지방을 저장하는 쪽이 아니라 지방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유전자가 변화하려면 앞으로도 몇 만 년이 더 걸릴 것 같다. 이처럼 우리의 유전자는 10,000년 단위로 변하는데 세상을 10년 단위로 변하니 이 차이에서 많은 불행이 생산된다. 아이들은 동네를 뛰어다니고 공감 능력을 발휘해 팀을 짜서 축구 경기를 하고 땀을 흘리며 놀아야 하는데, 에어컨이 나오는 교실과 방에서 가만히 앉아 땀이 전혀 안 나는 상태로 대부분 시간을 보내니, 공부만 빼고 다 행복하다는 성현이 조각상 같은 얼굴에 심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인간에게는 탁 트인 공간, 태양이 비치는 공간에서 걷고 달릴 수 있도록 우아하게 두 다리가 만들어졌고 그것을 갈망하는 본능이 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쉬는 방식 중 하나가 햇살 좋은 날 자연 속에서 산책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본능에 반하여 좁은 교실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학생이 참여하기보다는 선생님의 설명 위주로 된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의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 아이들은 교실 밖으로 튀어나가 뛰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다. 몸은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붙잡아 두는 시간 만큼이나 아이들은 나가서 뛰려고 하고 나는 이 아이들의 본능에 공감한다. 이 공감 능력이 때로는 수업에 방해가 된다. 아이들의 표정이 점점 무표정이 되고 수업에 활기가 없어지고 문제를 푸는 속도가 너무나 느려지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나는 마음이 아프다.
사실 마음 아파하지 않고 그냥 진도 나가고 숙제 많이 내주고 숙제 다 못하면 혼내줄 수 있지만 나는 그냥 거기서 진도 나가는 것을 멈춘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내 숙제가 수학 과외 숙제보다 적다고 한다. 그래서 제일 할 만한 것이 영어 과외 숙제라 하니 그 말에 나는 좀 덜 괴롭히고 있어 다행이다 싶다. 그래서 나는 도시의 학원만큼 선행학습을 하지 못한다. 최대한 노력해서 중3 겨울 방학 때 고1 11월 수능 모의고사 기준 90점 이상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이 목표에 이르는 학생들은 반 정도 될까 말까 한다.
공감으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기를
문장의 5형식이라는 것은 왜 문법책 1단원에 나오는지 참 난감하다. 사실 5형식이라고는 되어있지만, 1형식부터 4형식까지는 좀 할 만한데 5형식이 되면 여러 가지로 다른 형태들이 나온다. 지각 동사, 사역동사, 목적격 보어, to 부정사, 동사의 원형 등 갖가지 용어가 튀어나오는데, 다른 문법을 두루 배우고 문장의 5형식을 배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1단원을 뛰어넘고 2단원부터 하자고 하면 굳이 1단원부터 하자고 한다. 심지어 초등 영어학원에서도 이놈의 5형식을 가르치니 들어본 풍월이 있어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데 다섯 가지 문장형식의 개념만 가르치고 문제를 풀라고 하면 이런 거 왜 배우냐고 나한테 항의를 한다. 그래서 문장의 5형식은 나중에 하자고 설득하고 가장 쉽다고 느껴지는 단원을 아이들보고 정하라고 하고 문법책을 시작한다.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표정을 보면 내 마음도 어렵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 한 소아정신과 의사가 쓴 글을 크게 공감하며 읽었다. ‘공감은 특별한 능력이고 존재한다면 큰 선물일 뿐 당연한 것은 아니다. 아이는 한두 명의 지지에 기대어 힘든 성장의 시간을 버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의사인 본인이라도 아이의 편이 되어 줄 뿐, 모두가 아이의 편이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이 옳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선함이 아니라 직업에 필요한 전문성의 일부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내 딸이 중학생이었을 때보다 지금의 내 학생들에게 더 허용적이고 공부라는 고통에 더 공감하는 것 같다. 아마도 딸보다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명문대학 입학을 인생 지상목표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이 생겨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이가 들수록 나는 아이들이 대학 입시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과외 수업을 받는 아이들이 너무 측은하다. 전교 1등을 하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에서 스트레스받으면 마음에 병이 생기니 뛰어놀라고 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커진다. 소아정신과 의사는 직업적 선함이 전문성이 되지만 과외 선생의 경우 학생의 학습 정서에 크게 공감하지 않고 수업할 수도 있고, 학습 정서를 해치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늘 후자를 선택해 왔다.
아이들이 공부하다가 ‘너무 어려워요’ ‘숙제가 많아요’라고 하면 ‘살려주세요’라고 들려서 괴롭다. 내 딸이 공부하다가 어렵다고 입이 나오면, 나는 늘 그럼 그만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딸아이가 다음 날 다시 해보겠다고 하던 경험이 나에겐 지금까지 나의 가르치는 방법의 근간이 되었다. 어렵다는 걸 공감해 주면 용기가 생기고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모양이다. 어려우면 그만해도 좋다는 말이 공부를 아예 그만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뇌와 마음이 지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해 준 것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 대부분 공부의 이유를 알지만 이제 막 중학생이 된 1학년 학생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사춘기 시기를 보내며 5만 년 전의 본성의 꾹꾹 누르고 앉아 있는데 나라도 그걸 알아줘야지 하는 마음이 든다. 그것에 모든 아이의 성적 향상과 연결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의 이 물렁물렁한 태도는 공부를 안 해도 괜찮다가 아니다. 어려운 것은 잠시 멈추고 쉬운 것부터 하고 나중에 해도 괜찮지만, 꼭 해내야 한다 뜻이다. 아이들이 이걸 알아차려만 준다면 나는 최상위 성적으로 끌어올리는 선생님이 될 텐데 모든 학생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뛰어놀고 싶어도 핸드폰과 게임의 유혹에서 벗어나 똑바로 앉아 숙제를 다 하면서 긴 세월을 지나 원하는 대학에 가서 대학교 1학년 인생을 즐기고 있는 학생들이 있다. 그 학생들 덕에 물렁물렁한 선생이지만 즐겁게 살아간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늘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