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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Mar 19. 2022

영어가 웬수인 아이

웬수가 친구가 되길 소망하며

아이들은 글씨를 읽는 어른들을 보면서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한다. 글자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질수록 한글을 더욱 빠르게 배운다. 마찬가지로 영어 알파벳도 한글과 다르게 생겨서 또 호기심이 발동하고 아이들은 배우고 싶어 한다. 호기심이 생기기도 전에 지식을 주입하면 모든 것이 배우기 싫어지는, 만유인력과도 같은 보편적인 법칙이 있다. 호기심 선행 법칙!     


호기심의 새싹을 마구 짓밟는 것이 조기교육이라고 부르짖고 싶다. (물론 선행학습이 가능한 아이도 있고 선행 학습이 필요한 시기도 있다. 선행학습 하면 안된다는 말이 아니라 너무 어려서 부터 지식교육을 하면 안된다는 뜻에서다.)  호기심이 생기면 배움이 경이롭고 재미있지만, 호기심이 없는 상태에서 어른이 아이를 가르치려 들면 모든 과목에 혐오감이 생기고, 그 과목과 애정 관계가 아니라 원수 관계가 된다. 배움의 원리와 어린이의 뇌 발달 상황을 모르는 어른들이 교육을 망친다. 아직 문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만 5세 정도의 아이들에게 한글도 모자라 알파벳까지 가르치면서 어머니들은 이중언어의 꿈을 꾸기도 한다. 핀란드에서는 문자교육을 초등학교 이전에 할 수 없도록 법제화되어 있다는데 우리나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적어도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놀이를 통해 배우고 지시기 교육보다 신체 활동을 더 많이 하는 교육이었으면 한다.  어머니들의 욕망으로 덧칠된 조기교육을 모든 아이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디지 못하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한다. 견디는 듯 보여도 호기심이 없어지는 중대한 유증이 생긴다.


상혁이 어머니는 영어 공부방 선생님이다.  나는 중고등 학생만 가르치지는데 초등학생인 상혁이를 내가 맡게 된 것은 어머니가 상혁이를 가르치는 것이 힘드셔서 나에게 보내셨기 때문이다. 모자간의 싸움에서 어머니가 일단은 백기를 드셨다. 아이는 이겼지만, 만신창이가 되었다. 상혁이는 유치원 또는 1학년 때부터 5학년까지 너무 많이 배우느라 지쳐버렸다. 어머니가 사교육 선생님일 때 자녀를 자신의 수업에 다른 친구들과 참여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엄마와 교사라는 이중 관계라는 위험성 때문에 아이를 잘 관찰하고 아이가 잘 적응을 하지 못하면 수업을 중단해야 하는데, 상혁이 어머니는 너무 공부 하기 싫어하는 아들과 함께 수업을 어쩔 수 없는 여러 사정으로 진행해왔다.    

 

엄마와 함께 공부방에서 한 교실에 학생이 3~6명 있는 상태에서 상혁이는 5~ 6년 동안 공부했다. 의식이 있는 자기 인생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상혁이가 단어 숙제하기 싫어하면 같이 공부하는 다른 친구들보다 적게 해도 괜찮다고 했고, 공부하다가 짜증을 내면 수업 중간에 나가도 되는 선생님 아들이라는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공부를 더 잘해 보자고 아이를 더 혼내거나 달랠 에너지가 없는 어머니는 나에게 아이를 보내셨다. 어머니가 얼마나 아들과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까 마음이 아팠다.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초등 영어는 듣기 말하기 위주이고 문법은 많이 가르치지 않고 문자가 교과서에 많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초등학교 영어에 충실해도 중등과정을 수행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지만, 보통 초등 영어 공부방에서는 1년~2년 정도의 선행학습을 한다. 상혁이 어머니 공부방의 경우 최종 결과를 보면 6학년 아이들이 중학교 2학년 정도의 듣기 평가 문제집을 풀고, 중학교 1학년 교과서 본문을 다 외우고, 초등 영어단어 1200개 단어장을 여러 번 복습한 상태였다. 초등학생이 수능을 푸는 괴력을 보여주는 아이들이 강남에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의 수준도 선샌님과 학생 모두의 많은 노력과 인내의 산물이다.


상혁이를 처음 만났을 때 5학년이었지만 파닉스도 완전하지 않았고, 5학년 듣기 평가도 70점 정도 맞았고, 듣기 문제 받아쓰기는 거의 되지 않았다. 단어를 쓸 줄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평균적 5학년에 못미치는 상황이었다.

    

상혁이는 우리 집에 오고 싶지 않아서 처음엔 누가 손을 잡고 왔고 그다음부터는 혼자 오긴 했는데 숙제라는 걸 해오질 않았다. 단어 시험을 보면 50점도 안 나왔고 글씨도 엉망이어서 영어 4선 공책에 직선들을 무시하면서 크고도 힘차게 알파벳을 썼다. 우선 단어를 조금씩 외우면서 숙제를 잘 해오라고 부탁만 하고, 안 한 것에 혼내지 않고 8개월의 세월을 보냈고 2022년 새봄 3월이 되어 상혁이는 6학년이 되었다. 해가 바뀌고 6학년이 된 아이가 아주 적은 양의 숙제를 안 하는 것에 너무 화가 났지만, 꾹 참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나 : “상혁아, 너 이제 6학년이고 내년에는 중학생이야. 공부를 너무 안 하면 대학에도 못 가고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면 좋은 직업을 갖기도 힘들어지는데 어쩌지?”

상혁 : 전 엄마하고 살 거라 돈 벌 필요가 없어요!

나 : 엄마가 너를 계속 먹여 살릴 수는 없는 거야.

상혁 : 그럼 엄마랑 살면서 아르바이트해서 조금만 돈을 벌 거에요.

나 : 엄마 돌아가시면 어쩌지?

상혁 :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죠.

나 : (매우 큰 소리로) 야! 그럼 공부를 뭐하러 해. 너의 어머니 돈 아깝고 내 시간도 아깝다!

상혁 : (놀라지 않고 매우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근데 선생님은 왜 소리를 지르세요?    

 

나는 왜 소리를 지르냐는 말에 창피해졌다. 그렇지. 소리를 지르면 안 되지... 나는 그 순간 이 아이가 6년 동안 영어와 웬수였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6년까지는 아니었어도 최근 1~2년은 최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상혁이가 공부함에 있어서 언어나 정서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알아보기로 했다.


국어와 영어 학습은 같은 언어학습이기 때문에 국어가 현저히 떨어진 경우에는 영어도 배우기 힘들기 때문에 ‘기초언어능력 평가지’를 구해서 문제를 풀어보라고 했다. 이 평가지는 <공부머리 독서법>이 저자이신 최승필 선생님이 만드신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중학생들이 하도 많아서 아이들을 도와주려고 책을 읽었는데, 책에서 나오는 평가지를 처음으로 풀어본 학생이 상혁이가 되었다. 문제 푸는 것도 너무 싫어해서 안 되는 걸 알면서 2일에 걸쳐 반씩 풀게 했다.


점수는 45점. 이 평가지는 초등 4학년부터 중등 3학년까지를 위한 것이라 초등 5학년의 평균점수는 45점이었다. 막 6학년이 된 3월이므로 5학년으로 보았을 때 많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일단 언어능력의 문제로 공부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공부 정서가 망가져서 학습 무기력증이 아닐까 의심을 해 봤다. 그래서 대화를 해 본 결과 과외 4과목과 학습지 2개를 하고 있었다. 6가지 사교육이니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3시간을 몰아서 하는 국어논술 수업은 지루하고, 주 2회 수업하는 수학은 할 만하고, 주 2회 수업하는 영어는 어렵고, 학습지 한자는 너무 안 외워지고, 학습지 국어는 노 코멘트. 오직 과학실험을 하는 과학수업은 좋다고 했다. 그나마 좋아하는 것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수학이 그나마 할 만하고 과학을 좋아하니 학습 무기력증이라 말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집안 환경과 어머니와의 관계를 물었다.  

   

나 : 상혁아, 내가 내준 숙제가 너무 어려우면 영어 선생님이신 엄마한테 물어봐.

상혁 : 엄마는 방에서 아이들 가르치시거나 집안일을 하시기 때문에 시간이 없으세요.

나 : 엄마의 수업이 저녁 7시면 끝나잖아?

상혁 : 엄마는 저녁에도 바쁘세요.

나 : 그럼 누나들한테 물어보면 안 될까?

상혁 : 누나들도 다 공부하느라 바빠요. 사실 제 마음을 공감해 주는 사람은 선생님 밖에 없어요.

나:….     

(엄마가 계속 바쁘다는 것은 상혁이의 핑계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일단 믿기로 했다. 관계의 기본은 신뢰 관계이므로...)


엄마와 집에 같이 있기는 하지만 엄마는 상혁이를 돌보는 시간이 절대 부족했고 공부하는 독립된 공간도 없었고 잠도 누나 방과 엄마 방을 오가면 자는 상태였다. 어머니와 이 점은 좀 고쳐보려고 전화해서 상담했지만, 오히려 상혁이가 너무 공부를 안 한다고 한탄하셨다. 더는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상담을 마쳤다.     

나는 이 영어와 웬수가 된 아이에게 영어공부를 ‘선택’하는 자유를 주기로 했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학습지 2개, 총 6개 사교육 모두 상혁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4과목 과외 선생님들은 모두 누나들의 선생님이었다. 누나들이 하니까 상혁이는 그냥 선택권도 없이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런 상혁이가 영어 수업을 스스로 선택해서 하면 책임감을 느끼고 숙제도 잘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상혁이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좀 공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을 겪게 하고 싶었다.   

   

나 : 이제부터 한 달 정도 수업을 하면서 상혁이 스스로 수업을 계속할지 말지 정해주 면 좋겠어. 내가 널 선택하는 게 아니고 네가 날 선택하라는 거야. 내가 맘에 안 들면 다른 학원으로 가도 좋아.

상혁 : 아 제가 선생님을 선택을 한다고요?

나 : 그래 한 달 동안 잘 해보자! (사실 나는 상혁이가 날 선택할거라 확신한다.)

    

나는 밝은 표정을 하고 집으로 가는 상혁이를 보면서 두 마음이 교차했다. 저 아이의 학습 정서를 내가 회복하고 싶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만용이 아닐까? 어머니와 같이 협력도 안 되는데 내가 감히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그래도 영어유치원 교수부장으로 만 3세 교실 학생부터 수능까지 가르친 베테랑이고, 내 딸 아이를 태어나서부터 고3까지 가르친 인내심 있는 선생인데 상혁이도 잘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를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최성애, 조벽, 존 가트맨 교수님이 쓴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이라는 책을 떠올린다. 아이의 감정을 수용해주고 작은 성취를 인정해 주면 아이 학업에 변화가 온다는 믿음을 갖게 한 책이다. 그래서 아주 조금의 숙제만 내주고 칭찬을 많이 해주고, 상혁이와 공부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올 한 해를 보내려고 한다. 초등학교 6년 동안 공부한 내용을 다 합쳐봐야 예비 중 겨울 방학 두 달 동안 따라잡으면 되기 때문이다. 감정코칭이 만병통치약을 아니라 100% 잘 될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도전해 보기로 했다. 절대 상혁이는 뒤 쳐진 것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아이의 마음 밭이 현재 '돌밭'인 것 뿐이다.

  

나 : 상혁아, (나는 빈 종이를 둘로 나눠서 아래를 땅이라고 적고 돌멩이를 그린다.) 공부는 천천히 해도 괜찮아. 상혁이 마음  밭에 지금 돌멩이가  많은데 나랑 같이 돌을 걷어내고 좋은 땅으로 만들자. 그러고 나서 공부해도 늦지 않아.  좋은 땅이 되면 영어가  웬수가 아니라 친구가 될 거야.

상혁 : 와 진짜요?? 공부를 많이 안 해도 된다고요? 앗싸! (아이는 내가 그린 땅 위에 큰 나무를 그린다.)

    

공부 많이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얼마나 기뻤는지 우리집 자습실에서 자습하러도 오겠다고 한다. 나에게 자꾸 칭찬을 받고 싶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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