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 선생님! 고등학교 가면 음악 미술 체육 성적에 안 들어가요?
나 : 응 맞아.
민지: 그럼 음악 미술 체육 점수가 안 좋아도 고등학교 가는 데 문제없죠?
나 : 고등학교, 대학교 가는 데는 문제 없지. 근데 음악 미술 체육 못 하면 인생이 재미없어.
지난달에 중간고사를 본 중학교 2학년생 민지는 수행평가로 해야 하는 음악 미술 체육 숙제가 귀찮아져서 나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소위 주요과목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이 다섯 과목을 제외한 과목에 대해서 아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고등학교 입시에 들어가지 않으니 쓸데없는 과목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등학생일 때는 피아노, 바이올린, 미술, 태권도, 축구를 배우던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면서 예체능 학원을 그만 다니고, 국어 영어 수학 학원으로 간다. 그런데 영어 과외 선생님인 나는 영어보다 음악 미술 체육이 인생에서 훨씬 중요한 과목이라고 자신 있게 말해준다.
실제로 피아노를 즐겨 치거나 태블릿PC에 그림을 그리거나 농구를 좋아하는 학생들의 학교 성적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 예술 체육 활동은 노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고 긴장을 풀게 해서 다시 공부를 더 잘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휴식 시간에 스마트폰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학생보다 예술이나 체육 활동을 하는 학생이 성적도 우수한데, 동네 남자 중학교에서 관악부에서 튜바를 연주하는 학생이나 청소년 수련관에서 치어리딩 활동을 하는 여학생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관악부나 치어리딩처럼 팀으로 연습하고 대회도 나가고 하는 활동은 학원에 다니며 개인적으로 배우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양이다. 나는 그런 방과 후 활동 때문에 수업을 빠지게 되는 경우 기꺼이 보충수업을 해주고 응원해준다. 학교 내신 성적에는 쓸데없어 보이지만, 이 과목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에 사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들이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공부까지 잘하게 해주니 말이다.
경제적 자유를 얻어 조기 은퇴를 하는 것으로 인생 설계를 하는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족이란 용어가 있다. 완전히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먹고 사는 것 이외에 쓸데없어 보이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나는 경제적 자유라고 정의하고 싶다. 과외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학생의 수와 수업의 양을 조정할 수 있으니, 약간 수업을 줄여서 수입을 줄더라도 줄어든 수입만큼의 자유시간을 얻을 수 있다. ‘수입이 없어도 된다’가 아니라 ‘수입을 조금 줄여도 된다’라는 의미에서 경제적 자유다. 삶을 바꾸는 방법의 하나는 ‘시간을 다르게 쓰는 것이다’라고 경제학자 오마에 겐이치는 말했다. 나에게 시간을 다르게 쓰는 방법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음악 미술 체육으로 채우는 것이다.
딸 아이가 고 3일 때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수업을 하며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살기도 했다. 아이가 대학을 가고 나서는 토요일 하루만 쉬었다. 그러다가 2021년부터 수업을 줄이고 금요일 토요일을 쉬고 일요일에 수업하도록 시간표를 짰다. 금요일에는 기차표를 타고 서울에 가서 친구를 만나고 미술관을 관람하거나 서울에 내 추억이 묻은 장소를 방문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어려운 인생의 고비고비를 넘어 그 어려운 갱년기까지 지내고 50대가 중반의 나이가 되면, 그동안 잘 살아왔다고 나 스스로 칭찬을 해주고 음악 미술 체육 과목의 덕성을 살려 한 달에 한두 번 한가로이 노는 것도 괜찮다 싶다.
요즘은 피아노 음악을 듣는 데 시간을 예전보다 더 보낸다. 작년 반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해서 세계적 스타가 된 피아니스트 임윤찬 군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자주 듣는다. 들을 때마다 항상 머리칼이 쭈뼛, 온몸의 털이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한편 세계적인 스타 연주자들인 손열음, 유자왕, 조성진, 거기에 임윤찬군이 존경한 호로비츠 할아버지의 연주를 임윤찬 군 연주와 비교해서 듣는 재미에도 빠져든다. 음반이 없어도, 고급 오디오가 없어도, 공연장에 가지 못해도, 유튜브 덕택에 무한 반복하며 연주자의 표정과 몸짓까지 보니 부족할 게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연주자들의 음악을 듣다 보면 한두 시간이 10분처럼 지나간다.
한편 이상하게도 나는 바흐의 피아노 협주곡이나 평균율이나 토카타의 빠른 곡을 들으면 힙합 댄스 음악을 듣는 것처럼 흥겹게 춤을 추고 싶어져서 춤도 춘다. 그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행복해진다. 협연이든 독주든 피아노곡은 다 좋다. 중학교 2학년까지 음악적 재능이 없지만, 피아노 학원을 보내주신 부모님 덕택에 나는 피아노를 알게 되었고 청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피아노 음악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중학교 때 공부에 방해된다고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다면 이런 호사를 중년의 나이에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안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 친구가 나에게 ‘훅트 온 클래식 Hooked on Classic’이라는 LP 음반을 들어보라고 빌려주었다. ‘고전 음악에 낚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 음반은 루이스 클락의 지휘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 연주이지만, 수백 가지 유명한 클래식 음악의 멜로디를 메들리로 엮어 연주한 것이었다. 친구는 이 음반으로 클래식 음악의 주요 멜로디를 학습하면 FM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아는 멜로디가 나와서 클래식에 입문할 수 있다고 했다. 들어보니 음반에는 공영방송 시그널 음악도 있었고 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곡들의 멜로디가 수두룩했다. 아버지도 이 음반에 반하셔서 테이프를 사셔서 운전하시면서 줄곧 들으셨다.
친구의 해박한 클래식 음악 지식이 부러워 Hooked on Classic 음반을 마르고 닳도록 들은 뒤, 지루해 보이던 클래식 음악 라디오 방송을 열렬히 듣게 되었다. 라디오로 팝송만 듣던 나에게 클래식 음악을 알게 해준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었다. 피아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주장하셔서 중급 정도까지의 피아노 수업을 했고, 친구가 권한 절묘한 음반으로 나는 중년의 나이에 혼자서 음악을 통해 즐겁게 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은 피아노든 바이올린이든 악기를 배우는 수업을 중학교까지는 받아보라고 권한다. 중학교 정도까지는 배워야 혼자 즐길만한 기술을 익힐 수 있어서 그렇다. 인생에 이만한 투자가 없다.
If u cn rd ths, u cn gt a gd jb w hi pa!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한 에세이에서 1970년대 뉴욕 지하철에 포스터에 있었던 글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원래 문장은 If you can read this, you can get a good job with high pay (당신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높은 급여의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다. 실제 영어는 50% 이상의 잉여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철자의 절반 정도가 빠져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언어뿐 아니라 인간 유전자도 그렇다고 한다. 인간 게놈 분석이 끝났을 때 의미 있는 유전자는 10%이고 90%는 정크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 연구들은 이 쓰레기도 재활용되며 자연은 생명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DNA의 엄청난 잉여성을 부여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삶의 잉여성이 극치를 이루는 것은 은퇴가 아닐까 싶다. 생산성, 경제원칙, 효율, 능력과 같은 단어와 헤어지고 몰입, 재미,관계, 창조와 같은 단어와 친해져서 행복한 시기일 것이다. 내 남편도 어반 드로잉이라는 그림 그리기를 독학으로 연습하고 있다. 노후대책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노후자금 마련과 같이 즐겁게 지낼 친구를 확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경제원칙에 벗어나서 돈이 되는 것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음악 미술 체육 3형제의 축복을 비축해 놓는 것이다. 이 3형제가 있으면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과 동호회도 만들어 노년에도 나보다 젊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고, 예술의 세계에서 위로도 받을 수 있고, 함께 운동하며 즐겁게 건강을 유지할 수도 있다.
음악 미술 체육 3형제의 덕성은 인생 끝날까지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