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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Apr 06. 2024

꽃보다 사람이 예쁘네

교토 여행

판사 : 40년 동안 남편과 행복하게 지낸 비결이 뭔가요?

할머니 : 남편은 항상 내 의견에 동의해 줬어요.

판사 : 그렇군요. 오늘 내셔야 할 벌금이 50달러인데 오늘 지불 가능하신가요?
 할아버지 : 아니요. 다 낼 수가 없어요.

할머니 : 아니요. 다 낼 있습니다.

할아버지 : 네! 오늘 다 낼 수 있습니다.     


인스타에 짧은 동영상에서 본 한 노부부와 판사가 나눈 법정에서의 대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부부는 50달려의 벌금형을 받는다. 아주 친절한 인상의 판사님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낸 비결을 묻자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항상 자기의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벌금 50달러를 낼 형편이 안된다고 했다가, 아내가 낼 수 있다고 하니 바로 아내의 의견에 찬성한다. 행복한 아내, 행복한 인생 Happy wife, happy life 이라는 미국 속담이 있다. 아내가 행복하려면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 주어야 하고 의견이 일치하면 부부는 부유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 나는 이 노부부가 요즘 피어나는 벚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일찍이 40대 초반의 남편은 그 행복의 비밀을 간파했는지 내가 뭔가 말하면 다 맞다고 해 주었다. 아마도 나의 수다에 지쳐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상담심리를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그건 아니야라고 반대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딸 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 고등학교를 과학고를 보내야 한다고 공원 벤치에서 열변을 토하던 나에게 그렇다고 해 주었던 남편은, 얼마 지나 과학고 입학 준비가 우리 아이에게 너무 험난하다는 것을 알고 과학고는 절대 가면 안 된다고 하는 내 말도 옳다고 했다. 아니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 거 맞냐고 항의를 하자 잘 듣고 있다고 했다. 왜 둘 다 옳다라고 하냐고! 과학고에 대해 스스로 헷갈리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내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을 잘 듣고 있다가 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게 해 주었다. 서로 화내지 않으면서 고등학교 진로 문제에 대한 고민을 종결했다.      


행복한 아내는 의견을 존중받는 아내라는 진리를 일찍이 깨달았던 남편과 크게 싸우는 일이 없었다. 나도 남편의 의견에 늘 동의한다. 직장을 그만 두거나 창업을 하거나 낯선 지방으로 이사를 가자거나 할 때 반대하지 않았다. 바보처럼 상대가 옳다고 해주는 것이 30년 결혼 생활의 노하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며 정신없이 살다보니 남편은 어느새 만 60세가 되고 머리는 하얗게 변해 버렸다. 남편은 노화가 슬프기도 하지만 은퇴 후 ‘시간’이라는 복을 받고 있다고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무실에 묶여 있지 않고, 카페도 가고 점심에 뭐 먹을까 식당 검색을 하는 그 시간이 복이라고 했다. 애교살이 예뻤던 남편의 눈 밑 지방은 점점 더 도드라지고 주름도 생겨나고 있지만, 시간의 복을 받은 남편의 얼굴은 동영상에서 본 할아버지의 얼굴과 닮아 보였다.     


지난 달 말에 남편은 환갑이 되었다. 아무리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만으로 60살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그의 인생에 나는 오래오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가 1995년 4월에 만났으니 거의 30년 동안 각자 인생의 반절은 서로 함께 했다. 환갑의 기쁨에 나도 충분히 동참하고 같이 즐거워 환성을 지르고 살아온 나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싶다. 그 마음으로  우리는 교토에서 벚꽃 구경을 가기로 했다.     


꽃 구경을 위해서 우리는 환갑 생일 파티도 미역국도 다 생략하고 새벽 4시부터 일어나서 어둠울 뚫고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오사카 공항에 도착해 바로  기차를 타고 쿄토까지 갔다. 아직도 지폐를 매표 기계에 넣고 동전이 와르르 쏟아지는 오사카역에서 우리는 광고판을 보면서 수 많은 핼로키티를 만났다. 여기가 일본이구나 확인했다. 동전을 주섬주섬 챙겼는데 표가 2장이 나와서 어리둥절. 2개의 표를 개찰구에 넣었더니 개찰구가 열리지 않아 당황. 한 개만 넣으니 문이 열려 기차를 탔는데 검표원이 표 검사를 했다. 그리고 표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쿄토 역에 도착해서 점심 식사를 할 때 즈음 우리는 마음을 놓고 쿄토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벚꽃은 거의 피어있지 않았다! 꽃을 보러 왔는데 아쉬움이 몰려왔다.     


쿄토에서 가장 먼저 간 곳은 철학자의 길과 은각사였다. 개천을 따라 벚꽃 가지가 늘어져 있는데 꽃은 피지 않고 조팝나무들의 흰 꽃잎이 눈부셨다. 이 조용한 산책길에는 작은 카페와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저절로 철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벚꽃이 만개하면 이 철학의 길이 사람들로 북새통이 될테니 지금이 차라리 좋을지도 모른다고 위로를 했다. 철학자의 길이 끝나고 은각사에 들어가니 일본식 정원이 아름다웠다. 연못과 이끼로 뒤덮힌 초록색 정원에 하늘을 찌르듯 높은 나무들과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사원 건물 자체보다 너무나 정원이 아름다웠다. 연못과 이끼가 가득한 땅 꽃들이 아직 피어나지는 않았지만 키큰 나무, 연못, 분재, 돌들이 은각사 건물과 어우러져 아스라하고 고상함이 공기에 퍼져 있었다. 이끼가 나무 아래 빽빽이 자라고 있는데 그 초록의 짙은 생감과 카펫같은 질감이 독특한 느낌을 자아냈다.      

정원을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에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모노 뒤의 장식이 각기 다 다르고 화려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머리를 올리고 진주나 꽃 장식을 한 검은 머리도 너무 예뻐서 미안하지만 허락도 없이 사진도 몰래 찍었다. 검은 머리와 형형 색색의 기모노를 입은 젊은 여인들의 뒷모습이 벚꽃의 아름다움을 능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벚꽃은 내년에도 또 볼 수 있고 벚꽃로에 살고 있는 덕에 집 근처에서도 많이 볼 수 있지만, 나의 젊은 시절은 다시 볼 수 없으니 더욱 젊은이들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에 매료 되었다.     

기모노 뒷모습을 본 이후로 청수사 올라가는 길에 걸었던 산넨자카, 니넨자카같은 고풍스럽고 우아한 골목길에서도 일본 여인들의 모습을 훔쳐 보았다. 눈화장을 주로 한 얼굴이 우리 나라 여인들의 화장법과 사뭇 달라보였고 여행자의 흥분되고 과장된 기분 때문인지 모든 여인들의 얼굴이 다 아름다워 보였다. 와 나도 저렇게 예쁘게 화장을 하고 기모노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꽃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일본 여인들의 얼굴을 보러 쿄토에 온 것 같았다. 아마도 벚꽃이 만개하지 않아 꽃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에 시선이 더 많이 간 이유도 있다.      


이번 여행은 꽃을 보러 떠났다가 사람의 얼굴을 더 많이 보고 온 여행이었다. 그리고 내 남편의 얼굴도 많이 들여다 보아서 행복한 여행이었다. 꽃이나 사람의 얼굴을 좋아하면 자본주의 끝판왕 시대에 좀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 생각은 사실 아인슈타인이 한 말에서 온 것이다. 절판된 버전의 구문독해책 <천일문>에서 본 말인데, 신기하게 이번 고2 3월 모의고사 34번에도 나왔다. 독일어를 모국어로 한 아인슈타인이 count라는 영어 동사가 ‘중요하다와 세다’라는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해서, 이런 멋진 언어유희를 한걸 보면 그는 분명 천재다. 아무튼 노년이 될수록 셀 수 있는 것보다 셀 수 없는 것에 마음이 간다.  

   

Not everything that counts can be counted, and not everything that can be counted counts.
 (모든 중요한 것이 셀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셀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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