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 앉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내 앞 테이블에 앉은 엄마와 세 살 쯤 되 보이는 귀여운 아기를 바라보게 되었다. 아기는 엄마 손 바닥을 주먹으로 치면서 장난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살살’ ‘살살’ 하면서 아기 손목을 잡고 세기 조절을 해 주고 있었다. ‘살살’이라는 말을 외국어로 번역하면 어떤 단어를 써야할까 문득 생각해 보니 의성어를 번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의성어 의태어들을 우리는 수없이 쓰면서도 그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살살’이란 의태어로 시작해 비슷한 의태어를 생각해 봤다. ‘슬슬 시작해’ ‘설설 긴다’ ‘술술 풀린다’ ‘솔솔 부는 바람’ ‘실실 웃는다’등등 모음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재미있는 뉘앙스 차이에 웃음이 저절로 난다. 우리말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외국에 살아본 경험이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임을 알게 했다. 우리말로 대화하고 글을 읽고 쓰며 영화나 TV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하는 이 자연스런 일이 다 감사한 일이다. 반대로 외국어로 산다는 일은 그야말로 스트레스다. 전화벨이 울릴 때도, 하다못해 가전제품이나 약 설명서를 읽을 때도 긴장해야 한다. 심지어 친한 친구와의 대화 중에도 잔뜩 귀를 쫑긋하다가 집에 돌아와 우리말로 가족과 대화 할 때 느꼈던 편안함을 기억한다. 더구나 아름다운 의태어 의성어를 쓸 때면 모국어는 정말 내 심장의 언어 heart language 라고 느낀다.
해외로 근무하러 가장이 가족과 함께 출국할 때 나에게 아내 분들이 어느 학교로 아이들을 보내야할지 물어볼 때가 있다. 나는 우리말로 공부할 수 있는 한인학교로 꼭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영어를 좀 잘해 보겠다고 영어로 가르치는 학교를 보내면서 자녀의 교육언어를 바꾸는 것은 나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의 영역을 넓혀 가야할 시기에 외국어로 공부하면 모국어로 공부하는 것에 비해 양과 질 모두 떨어지는 것도 문제다. 한편 자신을 영어에 최대한 노출시키기 위해 교회도 현지인들 교회로 나가는 분들을 본다. 그렇지만 기도하거나 설교를 들을 때 필요한 영적인 언어는 더군다나 외국어로는 불가능하다. 번역하고 해석하는 사이에 내 마음은 삼천포로 빠진다.
마음을 다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모국어가 필요하다.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희생되는 아이들의 모국어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다. 모국어는 단지 사고와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대상이고 나의 나됨을 만들어주는 세계이기 때문에 너무나 소중하다. 우리 몸에서 사랑과 영혼이 있다고 생각되는 심장, 이 심장의 언어를 함부로 하면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