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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Jun 04. 2024

제발 나를 떠나 줘

공부 자립을 위해

나 : 아무래도 숙제를 이제부터는 두 배로 내야겠어!

영민 : 안돼요. 수행평가가 죽음인데요. 살려주세요!

나 : 이제 슬슬 나랑 이별하고 혼자 공부해야지!

영민 : ... 엉엉     


  영민이는 정말 모범생 그 자체다. 중학교 1학년부터 나랑 과외를 시작했는데 중학교 3년 동안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단 한 문제도 틀린 적이 없다. 사실을 나는 영민이 후배 아이들에게 많이 이야기해주며 영민이 언니처럼 되라고 한다. 영민이는 내가 계획한 학습량을 다 소화했다. 중3 학생으로서 고등학교 1학년 수능 모의고사를 풀어서 90점 이상 나오면 고입 준비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판단하는데 그 정도 수준에 이르러 영민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학기 중간고사를 봤는데 98점이라는 최고 점수를 받고 1등급을 받았다.     


  여기까지 보면 영민이는 최고의 학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신 시험이 도시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쉬워서 만점 학생이 10%에 육박하는 작은 시골 학교에서의 성적이다. 이 시골 동네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고교학점제가 시작되고 나서 학력 미달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학교 시험은 점점 쉬워지고 있다. 아직도 중학교 성적을 가지고 입학을 해야 하는 비평준화 지역인 우리 동네는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면학 분위기나 시험 난이도 차이가 많이 난다. 사립학교에 비해 공립학교는 시험 문제가 쉽다.


  쉬워진 내신 시험으로는 변별력이 없으니 내신 시험과 수행평가의 비율이 4:6으로 변했다. 종이로 보는 지필고사는 40%이고 선생님들이 여러 방식으로 평가하는 수행평가가 60%로 바뀌었다. 그 40%에 해당하는 시험마저 쉽게 출제되니 과외 선생으로서 내신 준비를 하기 보다는 수능준비에 더 주력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우리 동네 공립고등학교 내신 시험과 수능시험의 간극은 매우 커서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수능준비가 되지 않는다. 하여 영민이가 학교 내신 1등급이 아니라 수능시험에서 영어 1등급을 하려면 숙제를 2배로 내야 하는 선생으로서의 괴로운 일을 해야 한다. 사실 2배가 아니라 3배 4배 내고 싶은 마음이다. 쉬운 내신 시험이라는 편안함의 지대 Comfort Zone을 넘어서려면 불편하고 힘든 과정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수행평가가 그 발목을 잡고 늘어지고 있다.


  중학교와 달리 수행평가는 모두 학생부에 기재되거나 내신 성적에 반영되는 것이니 소홀히 할 수도 없고 여기서 고등학교 생활의 어려움이 시작된다. 영민이는 벌써 위가 아프다. 위장이 가장 예민한 장기라서 그런 것 같다. 위가 아프니 잘 먹지 못하고 그나마 먹는 낙으로 버티는 힘도 없어지려고 한다.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너무 힘든데, 학교 선생님들 중에 너무나 ‘비정’하게 시험 보기 1~2주 전에도 수행평가를 내주시는 선생님들도 있다. 이런 사태는 공부 의욕을 꺾어 버린다고 영민이는 수업시간마다 30분은 성토대회를 한다. 성토대회 후에 한 주간 숙제 한 보따리를 풀어주면 나는 그 보따리에서 해결이 안된 부분을 짚어주는 방식으로 수업을 한다. 그런데 이 보따리가 너무 작아서 좀 더 큰 보따리로 만들어 주어야 하고, 보따리가 클수록 공부 독립은 빨리 된다.


  영민이의 공부 독립을 위해 2022년 3월 고3 수능 모의고사 37번으로 설득을 해야 했다. 학생을 효율적으로 공부하게 만드는 동기부여의 요소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지문이었다. 미시건 주립대학 교육대학 학장이었던 캐롤 애미스 Carole Ames에 의하면 양적인 변화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한다. 숙제를 많이 내주거나 공부시간을 늘리는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질적인 변화 중 하나는 우선 공부와 관련해 나 자신을 보는 것이었다. 내가 이 공부를 왜 하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공부를 했을 때 보상은 무엇인지, 공부를 하고있는 나 자신에 대해 나는 만족하고 있는지 등의 메타 인지적인 질문을 통해 스스로 공부의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 이런 질문을 선생님이나 부모가 하고 대화를 나누면 더욱 좋을 거 같다.     


  그런데 이런 자유로운 소통은 ‘양육적’ 가정에서나 가능하다. 그러니 스스럼없이 자기 의사 표현이 가능하고 부모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가정이라는 더 큰 숙제가 생겨난다. 결국 공부를 잘 시키려면 좋은 가정이 필요하다. 질적인 변화가 있다면 양적인 변화는 저절로 따라올 수 있어서 나는 영민이와 90분 수업 중에 30분은 메타 인지적 질문과 자유로운 의사소통에 쓴다. 그 30분이 아깝지 않은 이유가 있다.     

  

한편 Carole Ames은 교육을 이렇게 정의한다.


  Perhaps it makes sense to see education as being less about how much the teacher covers and more about what the students can be helped to discover

  교육은 선생님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치느냐에 덜 관련되어 있고, 학생들이 무엇을 발견하도록 도움받을 수 있는지에 더 관련되어 있다.    

  

 중1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까지 3년이면 영어 문법은 박살 낼 수 있다. 좋은 문법책들이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다. 유명 출판사에서 나온 저명한 저자들의 책이라면 무엇이든 괜찮다. 오히려 학원 원장님들이 자신의 문법 지식을 자랑하며 편집해 복사한 조잡한 책들은 피하는 것이 좋다. 문법이 끝나면 수능 어휘 6천 개를 커버하기 위해 나온 어휘책을 보면 된다. 교재가 없어서 공부 방법을 몰라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니다. 고등학생이 되고 학생이 이미 상위권 학생이라면 많은 수업이 필요 없다. 주 1회 90분으로도 충분하다.     


   18학번 나 딸이 중학교 때 친구와 같이 나랑 과외수업할 무렵에는 중3때까지 고등 문법 어휘 끝장 내달라고 애원을 하면서 고등학교부터는 자립을 하겠다는 아이들이 꽤나 있었다. 내 딸도 그중 하나인데, 요즘은 고1은 홀로서기가 힘들다. 고2 정도 되면 젖을 떼나 싶다. 스마트폰 없던 시절 아이들이 독서량이 더 많았고, 문해력이 높아 인문학적인 독해 실력도 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팬믹으로 인해 2020년 2021년 학습 결손도 문해력에 큰 타격이긴 하다.     


   문법과 어휘로 잘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긴 하다. 아이들은 철학자 이름이나 예술가 이름이 문제 지문에 나오면 뇌가 얼어붙는 모양이다. 철학과 예술의 배경지식이나 언어논리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어 수능에서 나오는 배경지식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지식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고등학교 사회탐구 과목에 나오는 내용이고 상식적인 내용이다. 철학, 예술, 교육, 심리, 윤리, 보건, 인류학, 경제, 역사 등 많은 인문학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 같지만, 대체로 이분법적인 비교와 대조라든지 현재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에 민감하다면 넘사벽의 문제들은 절대 아니다. 사회적 문제나 타인의 삶에 대해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확실히 문해력이 높다. 이런 학생들에게 인문학적인 배경 설명을 해줄 때와 언어 논리적인 구조로 답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 때 사실 나는 가장 보람을 느낀다.


   이런 설명도 한 6개월 길면 1년 정도 들으면 내 설명 보따리도 바닥이 나긴 한다. 그때쯤 되면 학생은 나와 수업을 종료하고 홀로서기를 하면 된다. 신생아로 누워 있던 딸이 앉 기어 다니다가 서서 그 첫발을 디딜 때, 아기 얼굴에 피어나던 희열을 기억한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짧은 영상에서 한 말이 기억난다. 아이에게 꼭 필요한 건 행복이 아니라 자립이라고. 공부 자립은 학생에게는 시간 절약이라는 부모에게는 돈 절약이라는 행복을 준다. 사교육의 목표는 수능과 내신 1등급이 아니라 공부 자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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