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을 오기 전, 스물네 살 즈음 한국에서 ‘내일배움카드’라는 청년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준비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편집 디자이너로 구직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잡코리아라는 사이트에서 처음으로 ‘UI/UX 디자이너’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그 당시 프로덕트 디자인이 아닌 UI/UX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편집 디자이너도 아니고, 웹 디자이너도 아닌 생소한 이 직업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해져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기 시작했다. 웹이나 모바일 관련 작업을 한다는 설명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낯선 세계였다. 당시에는 웹 디자이너라면 어느 정도 코딩을 하면서 제품 상세 페이지를 만드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처음부터 프로덕트 디자인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하는 분야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했고, 관련된 경험도 정보도 없었던 나로서는 안정적인 커리어를 위해 먼저 그래픽 디자인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픽 디자인은 디자인 업계 전반에 두루 쓰이는 기본기이자, 다양한 분야를 탐색해볼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당시 광고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학교에서는 첫 해에 드로잉과 색채 이론 같은 기본기를 다지고, 2학년부터는 광고와 그래픽 디자인 수업을 본격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3학년 무렵이 되었을 때, 나는 서서히 진로를 프로덕트 디자인 쪽으로 바꿔야겠다고 마음먹기 시작했다. 디자인 트렌드의 변화도 한몫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점차 깊어진게 가장 큰 이유였다.
첫째, 모든 디자인이 디지털화되고 있다는 점.
둘째, 프로덕트 디자인은 ‘사용자 중심’이라는 철학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
셋째, 지금 이 직업이 디자인 업계에서 가장 유망하다는 사실.
먼저, 디자인의 디지털화는 우리가 매일같이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자리 잡았다. 지금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있는 기기—스마트폰이든 노트북이든 태블릿이든—모두 디지털화된 소프트웨어를 통해 작동하는 전자장치다. 우리가 사용하는 블로그, 웹사이트, 앱, 소프트웨어는 모두 디지털 공간 안에 존재한다. 그 디지털 공간안에서 사용자 중심의 매끄러운 인터렉션 경험을 만드는것이 바로 프로덕트 디자인이다.
반면 과거의 그래픽 디자인은 종이, 간판, 명함, 포스터처럼 물리적인 프린트 결과물들이 중심이었다. 인터넷 이전 시대에는 디자인들이 제품에 프린트화되어 보여졌다면, 현재는 모든 디자인이 스크린 위에서 보여진다. 스마트폰, 스마트워치, 자동차 디스플레이, TV, 태블릿… 프로덕트 디자인이 스며들지 않은 곳은 이제 거의 없다.
두 번째 이유는, 프로덕트 디자인은 단순히 예쁜 것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분야는 언제나 사용자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아름다움이나 개성보다는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의 편의성과 이해도를 우선으로 두며, 디자인은 결국 문제 해결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 중심에 있다.
그래서 이 직업은 단순한 심미성을 중요시하는 시각 디자이너라기보다, 제품을 어떻게 사용할지 기획하고, 리서치하고, 테스트하는 역할에 가깝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UI/UX 디자이너’라는 표현보다 ‘프로덕트 디자이너’라는 명칭을 더 많이 쓴다. 단순히 UI/UX 디자인에서 제품의 사용자경험만을 우선시하는것을 넘어서 비지니스에대한 이해도를 갖고 프로덕트 개발 프로세스에 깊이 관여한다는 뜻으로 이제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라는 이름이 쓰인다.
이 분야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가장 힘들었던점 중 하나는, 내가 만든 디자인에 대해 항상 '왜 이렇게 디자인 했는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했다는 점이다. 보통은 직관적으로 심미성을 위해 디자인 해왔었는데, 더 나은 사용자 경험을 위해서 디자인 뒤에 숨겨진 그 이유를 명확히 전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그저 감각과 직관만으로 디자인하는 부분에 부족함을 느껴 왜 이렇게 디자인되야할까라는 이유를 생각하며 디자인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오히려 내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비주얼 디자인 감각을 가진 디자이너들에게는 프로덕트 디자인 사고방식이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프로덕트 디자인은 현재 디자인 업종 중에서도 가장 유망한 분야 중 하나다. 패션, 인테리어, 산업 디자인, 모션 그래픽 등 다양한 디자인 영역이 존재하지만, 지금 가장 많은 수요와 기회가 집중되고 있는 곳은 단연 디지털 프로덕트 디자인이다. 앞서 말한것처럼 모든분야에서 디지털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네이버, 구글, 인스타그램, 유튜브, 카카오톡,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운영체제까지, 프로덕트 디자이너들의 생각과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만큼 제품의 사용자 경험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과 투자가 집중되고 있고, 연봉 또한 다른 디자인 직군에 비해 높은 편이다. 특히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는 대학을 갓 졸업한 주니어 프로덕트 디자이너조차도 첫해 기본 12만 달러 이상으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물론 도시의 생활비가 높긴 하지만, 다른 직종과 비교했을때 분명 경쟁력 있는 수치인 건 분명하다.
이 일을 하면서 한 가지 더 느낀 점이 있다면, 프로덕트 디자인의 프로세스는 스타트업과 같은 창업과도 잘 맞는다는 것이다. 사용자 중심의 사고방식은 고객을 이해하고 제품을 디자인하며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하는 데 있어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된다. 실제로 UX 백그라운드를 바탕으로 창업에 도전하는 디자이너들도 많다. 에어비앤비의 케이스처럼 디자이너들이 시작한 창업 성공 사례도 존재한다.
디자인은 더 이상 단순한 보여주기 위한 장식이 아니다. 기술과 함께 성장하며 이제는 제품의 본질을 구성하는 역할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그만큼 디자이너들에게도 보다 넓은 시야와 사고 방식이 요구된다. 커리어 선택은 결코 가볍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충분히 고민하고, 시간을 들여 알아보고, 나의 성향과 방향성을 스스로 점검한 뒤에야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내가 프로덕트 디자인을 커리어로 선택하게 된 이 세 가지 이유가, 누군가의 고민에 작은 힌트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https://litt.ly/teamours_desi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