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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로 걷기 Feb 16. 2024

은퇴 후 관계의 재정립

새로운 관계의 시작

은퇴 후 누군가를 만날 때 가장 어색한 부분이 나를 소개하는 일인 것 같다. 지난 34년 동안은 내가 누구라고 설명할 필요 없이 명함이라는 작은 종이가 나를 대변해 주었는데 이제는 나를 소개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     


더구나 은퇴 후 지금의 상태조차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자발적 실업이기에 백수나 구직자라 할 수도 없고, 퇴직자라 하는 것도 좀 이상하고... 고민 끝에 은퇴족이라고 스스로를 부르고 있는데 이 역시 어색하기만 하다.     


은퇴를 하면 현역시절 가졌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회적 평판도, 직책도, 권한도, 각종 기득권도... 그리고 일자리를 갖게 되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자리 나 역할에 맞는 모습을 하고 살아야 한다. 갑의 입장에서 을, 병, 정이 될 수도 있다. 현역시절 하던 일과 관련된 경제활동 등을 할 경우 특히 더 그렇다.     


몇 년 전 동료 중 한 사람이 대기업의 고문으로 재취업을 했는데 그 회사에서의 역할이 법위반 사전예방활동이나 자문역할이라 생각하고 입사를 했었다. 그러나 막상 회사에서 위법행위 등에 대한 로비스트 역할을 요구해 오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또 지인 중 한 명은 대기업에 임원으로 근무하다 관련 업종의 하청업체로 재취업을 했다. 이후 재취업한 회사의 직원들과 새로운 관계를 원만하게 맺지 못하고 또 원래 다니던 회사의 후배들에게 업무적으로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등 자리에 맞는 역할을 못해 결국 얼마 못 가 재취업을 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세상에 공짜가 없기에 어떤 회사 등이 전관 또는 경력자를 뽑을 때는 지불하는 연봉 등에 합당한 역할을 기대를 할 것이다, 만약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자리를 지킬 수 없기에 좋든 싫든 퇴직 후 갖게 되는 본인의 자리 나 역할에 따라 관계회사 및 원래소속 기관의 선후배 등과의 관계를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역시절 자신이 속한 회사의 관계회사로 취업을 한다면 새로운 회사에서 초임자로서 임해야 하고 또 전 소속회사에는 함께 근무했던 후배들일지라도 깍듯이 대해야 하는 등 과거 본인의 직책이나 역할 등을 모두 잊고 자신의 처지에 걸맞은 관계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신념 등을 바꾸어 가면서 까지 변신을 해야 하는지 여부는 조금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나는 대학 졸업 후 공직에 입문해 감사하게도 34년여 동안 상대적인 사회적 약자 편에서서 정의롭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내가 현역시절 그리고 퇴직을 앞두고 재취업 여부에 대한 고민을 하였던 부분은 물질적으로 조금 더 얻기 위해 그동안 살아온 나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하던 일과 관련되는 업종의 경제활동을 하게 되면 내가 그동안 공직자로서 가져온 소신과 원칙 등에 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직생활 중에는 내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의 범위 내에서 공정과 정의 등을 추구할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기업을 조사하고 위법행위를 행한 곳에 엄정하게 법위반 조치를 했다. 그런데 내가 그런 곳 중 하나나 로펌 등에 재취업한다면 내가 그동안 견지 해왔던 입장과 반대에 서서 규모가 작은 회사나 소상공인 등을 상대로 불공정거래를 하거나 소비자 피해를 발생시키는 등 위법행위를 한 기업 등을 옹호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마음이 간사한 지라, 내가 법적인 지식이 뛰어나고, 인맥이 두텁고, 처세술 등이 능해서 어디선가 높은 연봉을 제시하여 재취업을 하였거나, 내 경제적 상황 등이 좋지 않아 어디든 재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만들어 스스로를 합리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능력이 뛰어나지 못해 마땅히 오라는 곳도 없었고, 구직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고 거기에 관련법에 의해 업무 관련이 있던 회사 등에는 일정기간 동안 취업을 할 수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34년 살아온 소신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 그저 감사할 뿐이다. 


만약, 형편이 안 좋아 어쩔 수 없이 구직활동을 해서 법이 허용하는 범위의 로펌에 취업을 했다면 공직에 있었을 동안 조사를 하고 조치를 했던 회사들을 찾아다니면 구차하게 수임활동을 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법위반 등을 행한 회사들을 위해 비루하게 34년간 근무한 직장의 후배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는 부탁을 하는 등 그동안 펼쳤던 원칙 및 소신과 다른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현역시절 선배나 동료 및 후배들이 로펌이나 회사에 재취업해 업무상 연락을 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부분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 예의를 지키고 선을 넘지 않았으나 가끔씩 무례하고, 무리한 요구 등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특히 존경했었던 선배들의 월권행위는 나를 더욱 슬프게 하기도 했었다. 


앞으로 혹 내가 경제활동을 다시 시작한다 해도 관련 회사들에게는 법과 원칙을 주문하던 공직자로서, 직원들과 후배들에게는 원칙 등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주장했던 상사와 선배로서의 입장과 신념을 버리고 돈벌이를 위해 내가 했었던 일과 반대 입장에 서고 또 그것을 위해 그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충분한 재충전이 끝나고 일자리를 찾을 때는 그동안 살며 가져온 가치의 연속성 측면에서 급여가 적더라도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아무리 허드렛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에 맞는 모습과 자세로 임하려 한다. 은퇴를 한 지금 나를 소개해 줄 명함은 없기에 어느 곳에서 다시 일을 시작해도 과거의 나를 잊고 새로운 분야에 초년생으로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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