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
영국에서 숲을 걷다 깊게 자는 것처럼 몸을 둥글게 웅크린 여우를 본 적이 있다. 마치 칸켄이라는 브랜드의 로고처럼 몸을 스스로 휘감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 여우는 생명이 빠져나가 있는 상태였고 생명의 온기가 빠져나간 상태였다. 가만히 서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숲속의 깊은 장소에서 오 분 정도의 시간을 그 자리에서 보냈다. 잉태되어 새끼였다가 어미의 돌봄을 겪고 성년이 되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활보를 해왔을 생명이었다. 도심의 여우는 무리 지어 다니지 않는다. 도심과 숲속의 경계를 배회하며 먹이를 찾고, 생명을 잉태시키고, 잠자리로 돌아간다. 사람들과 숲속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돌아다닌다.
문득 사람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우들은 때론 도로에서 혹은 자동차 사이로 공원 사이로 길을 건너간다. 그렇게 짧게는 수년의 시간부터 재수가 좋다면 길게 살아가는 십수 년의 시간. 본능으로 살아가는 하루의 경계에서 생명을 이어 나간다.
하루는 운이 좋아 마음 좋은 어른들의 음식을 얻어먹고, 정말 운이 나쁘면 로드킬을 당하기도 하는 생의 무자비성을 겪기도 한다. 사람은 자신만의 철학과 자신만의 삶의 격을 만들어 나갈 수 있지만, 동물의 생은 사람의 것과는 다르다. 특히 여우의 눈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눈을 하고 있다. 여우는 사람을 빤히 바라본다. 개나 고양이은 십중 팔구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눈길을 돌린다. 그러나 여우는 다르다. 까맣고 갈색인 동공이 분명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눈동자가 비어 있는 느낌을 준다.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인간에게는 길들여지지 않겠다라는 의지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어린 왕자의 여우와는 다르게 자신의 소중한 세계를 보여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마주친 눈으로 보여준다. 때론 네 발로 서서 때론 엉덩이 쪽 두 다리를 땅에 걸터 앉아 낯설고 날이 선 상태로 있다. 여우의 걸음걸이는 늘 조심스럽다. 쫑긋 서 있는 귀는 소리와 주위 환경의 변화와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삼각형으로 서있는 귀로 평범한 일상에 위험을 감지하고 코와 함께 먹이의 소리를 감지하고 자연의 변화를 듣는다.
여우는 숲속과 주택가에서 초저녁부터 먹이 찾기를 시작한다. 먹고 쉴 곳을 끊임없이 찾아 바지런히 움직이는 네 발 뒤에 처진 꼬리가 있다. 개들의 올라간 꼬리가 길들여짐의 표시라면 여우의 꼬리는 야생의 그것이다. 한없이 땅에 닿아 존재를 숨기고 조용히 은밀하게 움직이는 몸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 그러고 보면 여우는 자객을 닮았다. 소리없이 움직이는. 가만히 서있을 때는 미동도 하지 않는 여우를 종종 본다. 무리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을 길들이는 것은 쉽지 않지만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소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와 조우에 성공했다. 어 린왕자였기 때문에 여우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은 생을 통해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다. 그중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절정이다. 똑같은 사랑은 없다. 하나로 맺어지는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은 빛나는 별들의 이야기다. 색깔도 반짝거림도 지속되는 시간도 천차만별. 심장과 심장 사이의 간격을 줄여나가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
런던 튜브의 역사(驛舍)에서 별이 된 이야기가 생각난다. 런던의 튜브에는 승하차 시 "발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Mind the Gap)라는 말이 하루에도 수천 번씩 재생된다. 1970년대 초에 이 목소리를 녹음했던 배우이자 성우는 오스왈드 로렌스였다. 1929년생인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배우 생활을 하다 2007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마거릿 맥콜럼 박사와 함께 런던에서 살았다. 마거릿은 남편을 잃고 그를 끊임없이 그리워했지만 행복한 추억을 들을 수 있는 역사가 있었다. 엠뱅크먼트(Embankment) 역이다. 그녀는 매일 빠짐없이 그의 목소리를 들으러 그곳으로 갔다. 2012년 전철 방송이 바뀔 때까지 그곳 역사에서 사랑했던 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안내 방송이 바뀌고 나서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그녀를 알고 있던 역사의 직원이 본사에 이러한 사연을 전했다. 본사와 디지털 팀에서는 아날로그였던 오스왈드의 목소리를 디지털화 하는 것에 성공했고 마거릿은 노던라인 엠뱅크먼트역의 노스바운드 플랫폼에서 그녀가 생을 다할 때까지 사랑했던 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런던에서는 이렇게 모든 생명과 도시의 이야기가 도시의 역사만큼 이어진다.
생명을 존중하고 삶의 이야기를 존중하는 런던에서 여우의 개체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든, 숲속과 공원의 다양한 생명 개체(여우의 먹이) 감소든, 사람들이 각박한 생활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든 다양한 이유로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주요 이유는 먹을 것이 없는 환경이라고 한다. 이제 런던에서 볼 수 있었던 유유자적한 여우의 방랑 생활을 앞으로 점점 더 보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숲속 웅크린 차가운 여우를 보며 생각했다. 조금 먼 미래에는 남은 한 마리까지 도심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여우가 보이지 않는 것이 어때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생태계는 늘 균형과 접점을 찾아 움직여왔다. 한 개체의 감소가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파급력이 크다. 그 파급력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조용히 재빠르게 소리 없이 늘 목적을 향하는 존재가 하나둘씩 숲속에서 사라지는 광경을 생각하면 그것 자체로 마음이 아프다.
런던 곳곳에서 인간과 멀고도 가까운, 도심에서 존재하는 잡식성 야행 동물의 마지막 걸음걸이를 본다. 그들의 사연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여우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와 여우의 눈동자가 계속 조우했으면 좋겠다. 어린 왕자같이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움직임을 간섭없이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개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런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