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추모하며, 그를 기억하며
15.1. “최대현, 양승은 두 아나운서는 MBC노조 총파업이 99일째에 접어든 지난 7일 노조를 탈퇴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양승은 아나운서는 복귀 후 주말 'MBC 뉴스데스크' 자리를 맡게 돼 '보은인사'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두 아나운서의 노조 탈퇴 이유는 '종교적 계시' 때문이라고 한다.” (한겨레) - 계시를 받으면 방언이 나온다. 방언은 뉴스가 된다. 정교 분리조차 불확실한 시대의 맨얼굴은 이런 식으로도 드러난다.
20.1. 나날을 바쁘게 산다. 그러다가 갑자기 육체의 소리를 듣는다: 또 하루가 간다...
20.2. 눈이 점점 침침해지면서 버릇이 생겼다. 때로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고 한다, 눈을 뜬 채로.
25.1. 어제 밤 많은 술. 너무 오랜 만에 만난 M 앞에서. 참 예뻤던 학생이었던 M. 그러나 갓 등 아래서 숨겨진 문장처럼 떠오르던 살결 밑 그림자. 이제는 저도 알만큼은 알아요, 라는 목소리. 어쩌지, 어쩌지, 애가 타서 자꾸만 마셨던 술. 하루 종일 깨지 않는 울적한 숙취.
27.1. 분명한 사실: 나는 많은 돈을 벌기보다는 강의하는 걸 좋아하고, 강의보다는 미인과 만나는 걸 좋아하고, 미인과 만나는 일보다는 혼자서 책을 읽는 걸 좋아하고 (예컨대 프루스트), 혼자서 책을 읽는 것 보다는 나만의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 또한 분명한 일인데, 나만의 글을 쓰는 것보다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생각조차도 안 하고,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나는 이 애착의 계단을 평생 거꾸로 밟으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내가, 이 깊은 밤에 돌연히 홀로 일어나 앉아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28.1. 어제 A가 말했다: 요즈음 소설들도 좀 읽어보라고.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이제 내게는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다고.
28.2. 아침에 아버지 생각.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 햇빛 좋은 아침, 푸른 청사진을 들여다보던 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아버지는 평생 그 꿈을 연기시키면서 살았다 (그 덕에 내가 살았다). 아버지의 삶은 내게도 상속되었다 (아버지 덕에 살았으니까). 그러니 결국 나도 아버지처럼 죽고 말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생의 소실점에서 만날 것이다. 그러나 소실점은 갈림길이 아닐까. 나는 언제나 아버지와 헤어질까.
18.1. 나의 생존방식. 위기를 만나면 나는 재빨리 우울해진다. 달팽이처럼, 조개처럼 우울의 각질 속으로 들어가서 숨는다. 그 안에서 웅크리고 고민을 하면서 자기를 괴롭힌다. 이 사도 매조키즘적 과정은 매우 생산적이다. 자기를 용서 없이 괴롭히다 보면 복잡한 생각들이 모조리 꼼수와 계산들 (doxa들)이란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게 나는 단 하나 육체적 판단력의 주체로 정화되고, 난제만 같았던 문제들도 투명하고 단순해진다. 그러면 우울 밖으로 나온다. 나는 지금 가볍고 밝고 명랑하다, 고치를 털어 낸 나비처럼.
22.1. “또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에 함께 실려 가던 우리는 이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져 흘러갈 것이다. 헤어진 두 강이 멀어지면 사이로 또 하나의 강이 이어지고, 아마도 자주 비가 많이 내려서 그 강에도 추억이라는 이름의 담수가 고여 흐르겠지만, 차츰 개인 날들이 많아지고 강수는 줄고 어느 날 문득 기억으로 들여다보면 메마른 강바닥만이 보일 것이다. 그러면 아픔도 다 나은 것일까. 아니면 그래도 남는 아픔이 있을까.” (출처 없는 인용문들의 모음집에서)
22.2. ‘애도 일기’의 역자 후기를 써야 한다. <바르트의 슬픔>에 대하여. 특히 이 문장에 대하여: “나의 슬픔이 놓여 있는 곳. 그곳은 ‘우리가 서로 사랑했다’라는 사실, 마마와 나 사이에 맺어져 있던 사랑의 끈이 끊어진 바로 그 지점이다. 가장 추상적인 장소의 가장 뜨거운 지점...” - 그런데 슬픔이 놓여 있는 곳이 ‘서로 맺어져 있던 끈’이 끊어진 자리일까. 그곳은 오히려 내가 누군가에게 ‘매어져 있던 끈’이 끊어진 자리가 아닐까. 글 속에서 이 차이를 분명히 할 것.
22.3. 공간 이동이 생기면 마음의 이동도 일어나는 걸까. 사람들 사이의 일들이 사람들 사이만의 일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 공간의 달라짐이 사람들 사이로 개입해서 어떤 일들을 촉발 시키거나 결정하기도 한다는 사실. 그런데 왜일까. 왜 공간은 사람들 사이로 끼어드는 걸까. 글쎄, 아마도 그건 사람들만으로는 안 되는, 그러나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어떤 일을 위해서는 아닐런지...
22.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 읽었다. 이런 문장, 아마도 누군가에게 나도 들어보았을 그런 문장: “...그는 트럭을 고치고 있었고, 그녀는 그가 늙어 보인다고 생각 했다.그녀는 그녀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도달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항상 그가 늙기를 바라 왔었다. 이제 그는 힘이 없었다.” 이어서 이런 문장. 아마도 내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을 그런 문장: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추어 스텝을 밟으며 테레자는 토마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걸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슬픔의 공간을 행복이 채우고 있었다.”
22.5. 자정 막 지난 시간,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 또 한권의 소설을 읽기 시작 한다: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의 ‘여명’.
22.6. 누웠다가 다시 일어난다. 머리가 맑지 못하다. 생각들을 관리하는 일이 힘들다. 개념들이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 나간다. 마음의 입자들도 멋대로 술술 빠져 나간다. 사전을 빠져나가는 단어들처럼. 이 헐거움을 참을 수 없다. 수치감.
23.1.1. 토요일 아침. 그 언덕 위에 차를 세운다. 아침 새들이 울고 한 여자가 베란다에서 흰 빨래를 넌다. 멀리에서 사다리차가 짐들을 내린다. 조용한 나날들. 가끔은 우울하고, 가끔은 기뻐하고, 가끔은 기다리고, 가끔은 잊으면서, 그렇게 조금만 덜 사랑하면서, 하루가 지나는 나날들. 지난 밤 꿈속에서도 뒤척였을 마음이여, 여기가 네 침대다. 이제 아무도 곁에 누울 이 없으니 길게 몸을 누이자.
23.1.2. 마석 집에 다녀왔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될 것이다. 필요한 일들을 부탁하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이층 서재로 올라간다. 텅 빈 책상. 먼지 앉은 의자들. 두 해 전 여름이 생각난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 마음을 끝없이 기록해야 했던 한 여름. 창 밖에서는 폭우가 내리고 천둥이 울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책상을 비워 두었는지. 갑자기 가슴이 메인다. 나는 이 책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러나 또 얼마나 배반하는지...
23.2. 종일 콜레트를 읽는다: “ ‘가을에만 수확을 하리니...’ 아마 사랑도 그럴 것이다. 가을은 관능에 헌신하기에 얼마나 멋진 계절인가. 아직 포도주가 되기 전의 보랏빛 포도즙 한 방울. 마른 눈물과도 같은 한 방울의 맛이 입에 남아 있고, 혀는 그 맛을 외친다. 수확. 허둥대는 성급함과 즐거움, 멀리 추수하는 곳에서 들려오는 장중하고 꿈꾸는 듯한 리듬, 그 어느 쾌락보다 강렬한 쾌락, 노래 소리, 취한 고함 소리... 그러고 나면 침묵. 운둔. 사람의 손으로 자비롭게 유린당했던, 그러나 이제는 그 손에서 벗어나 병 속에 담기고 봉인되어 누구도 만질 수 없게 된 햇 포도주의 긴 수면.... 인간의 마음과 육체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다.... 고맙게도 우리는 사랑 때문에 파멸을 피해갈 수 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행복에 만족하는 파멸을...” - 파멸을 면하는 길은 두 가지다. 누군가에게는 아직 사랑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23.3. 바르트의 사진 한 장. 사막 같은 표정으로 창 살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사진. 불현듯 언젠가의 꿈속에서 보았던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볼 한 쪽이 함몰되어 마른 웅덩이처럼 깊게 패인 얼굴.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던 그 갈 곳 없는 표정. 사랑의 시간들은 육체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사랑의 시간들을 떼어내는 일은 그렇게 아픈 걸까. 하지만 이후에도 삶이 불가능해지는 건 그 아픔 때문만이 아니다. 그건 그렇게 함몰된 육체의 웅덩이를 그 무엇으로도 다시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23.4. 저녁 약속. 오랜만에 친구와 술을 마신다. 그가 묻는다: 잘 지내? 나도 묻는다: 잘 지내? 마주보고 웃는다. 술잔을 부딪는다. 그리고 침묵. 문득 들려오는 Velvet Underground. 오래 전 시간들이 돌아온다. 다 그만 뒀으면 좋겠다, 친구가 말한다, 먼 데 여행이나 갔으면 좋겠어. 가라, 나는 말한다. 그러면서 혼자 묻는다. 먼 데? 어디? 먼 데는 갈 수없는 시간이다.
24.1. 새벽 산책. 자동차를 잃어버린 새벽 꿈. 번화가 횡단보도에서 맨홀에 바퀴가 걸린 자동차. 나는 차를 내려서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무언가를 줍는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나오더니 웃으며 다가온다. 그 순박한 웃음. 도와 드릴까요? 제가 먼저 차를 갖고 길 건너에 있을게요. 나중에 그리로 오세요. 나는 물건을 챙기고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가 가리켰던 곳으로 간다. 하지만 들러 봐도 자동차는 없다. 당황해서 서성이는데 지나던 사람이 말한다. 경찰에 빨리 신고하세요. 나는 전화를 건다. 남자의 목소리. 너무 늦었네요. 빨리 신고했으면 번호를 수색해서 찾을 수 있었을텐데... 나는 시계를 본다.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다. 그리고 또 깨닫는다, 시계를 찬 손도, 또 다른 손도, 텅 비어 있다는 걸.
24.2. 창문을 열어도 나가지 못하고 차 안을 헤매는 파리 한 마리.
24.3. 문자를 정리한다. 읽지 못하고 지나간 오래 전 제자의 문자 하나: 선생님 목소리 듣고 싶은데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문자를 넣는다: 나도 네 목소리가 듣고 싶구나.
24.4. 공원 옆 청소년 수련관에 알림천막이 새로 걸렸다. 녹색 숲 두 개가 서로 다가가는 그림 아래 글 두 줄: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숲이 되어 지키자’. 그리고 맨 밑에 서명이 있다: ‘신영복이 쓰고 이철수가 그리다’. 서로 모여서 무엇을 지키자는 사람들. 그런데 뭘? 쿤데라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키치는 존재의 본질적 가벼움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바꾼다.’
24.5. 아직도 차 안에서 헤매는 파리 한 마리.
24.6. 강의를 취소한다. 그것도 둘이나. 이제 텅 빈 며칠의 시간들이 앞에 놓였다. 늘 그랬다. 일에 매달리기. 무언가를 공격하기 (in Angriff nehmen). 그것만이 늘 나를 내게로 돌아가게 했었다. 글 하나를 써야 한다. 너무 길지 않게, 단순하게, 가볍게.
25.1. 월요일 아침. 애착이 없다. 끈질기게 붙들고 생각하는 능력도 없어졌다. 그냥 팔짱을 끼고 베란다 창 앞에 서 있기만 한다. 창 밖에 펼쳐진 긴 하루. 사막처럼 텅 비고 지루한 하루. 저 하루를 어떻게 건너갈까.
25.2. <애도 일기> 원고를 검토 한다: “온 몸을 탈진시키는 슬픔의 환유.” 그리고 몇 장 지나서: “슬픔이 멈춘 것도 아닌데 또 하나의 이름 모를 슬픔이 시작 된다.” 그리고 다시 몇 장 지나서: “니체: 기도하지 말고 깨어날 것. 애도의 슬픔이 나를 데려가서 만나게 하려는 것, 그것은 이 깨어남이 아닐까.”
25.3. 다시 <애도 일기>: “1979. 3. 15. 1년 반 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건 오로지 나뿐이다. 그동안 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들을 미루기만 하면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슬픔의 자기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 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 짓곤 했었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불굴의 집요함을 필요로 하는 일. 그러나 너무도 친숙한 나의 고향 같은 일” - <카메라 루시다>는 1979년 4월 15일에 시작해서 6월 3일에 끝난다. 다음 해 1월 갈리마르-쇠이유는 이 책을 출간하고, 2월 25일 교통사고를 당한 바르트는 3월 26일 사망한다. 어떤 작별은 모든 작별들의 끝일까? 모든 작별들의 끝으로 남겨지는 작별의 책. 그 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 작별의 책이 써지던 시기 <애도 일기>의 기록은 단 한 줄이다: “1979. 5. 1. 나는 마마와 하나가 아니었다. 나는 마마와 함께 (동시에) 죽지 못했다.”
26.1. 독일어 번역본 프루스트 전집이 도착했다. Eva Rechel-Mertens의 번역본을 Luzius Keller가 새로 편집한 수정 보완판이다. 이미 갖고 있는 판본과 이곳저곳을 비교해 보고 확실한 차이를 확인한다. 때로 이차 문헌을 읽다보면 (이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인용문 확인이 어렵기는 했어도 수정 보완판이 꼭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꽤 출혈을 하면서 굳이 프루스트를 새로 장만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물론 수년째 소설 수업을 함께 해 오는 분들이 프루스트를 완독해 보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국역본으로 하는 독서이고, 강의 준비를 위해 자주 대역 비교가 필요하기는 해도, 그 정도야 구판본으로도 충분하다. 어쩌면 나는 무엇과 작별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무언가 새로운 걸 시작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벌써 오래되었지만, 그 어느 때인가부터, 아마도 해가 바뀌면서부터, 나를 지속적으로 강박하는 자명한 상념들 중의 하나는 ‘이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라는 생각이다. 그 길고 어지러운 연상과 메타포들의 숲 속에서 길을 찾으면서, 또 그때그때 코멘트를 남기거나 거의 무의지적으로 떠오르는 상념을 적어가면서 (이게 문제다, 이 끝없는 텍스트들의 출몰), 이제부터 짬을 내어 조금씩 프루스트를 읽기 시작하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그럴 힘이 남아 있는 한, 나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에 도착하기에 내게 남은 시간이 충분할까. 일곱 권의 자주색 책들이 옹골찬 치열처럼 들어있는 전집 카세트를 보니 허허,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프루스트 전집을 굳이 새로 마련한 정작의 까닭은 더 사소한 곳에, 더 깊은 곳에 있는 것 같다. 글쎄, 나는 근자에 들어 더욱 심하게 그 무언가를, 내가 정 붙일 그 무언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애착할 수 있는, 나를 꼭 매어놓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27.1. 강의 준비를 한다. 머리 속에서 주제들이 맹렬하게 저항을 한다. 요즈음에는 모든 것들이 이렇게 버티면서 저항을 한다. 지친다. 생각도, 느낌도, 그리움도...
27.2. 남산 강의를 끝내고 테라스가 있는 곳에서 맥주를 마신다. 야경은 보석함처럼 반짝이고 밤바람은 부드럽고 다정하다. 지나는 여자들의 머리칼과 치마가 날린다. 아름다운 여름 밤. 불현듯 생의 충동을 느낀다. 그래, 아무 것도 늦은 건 없어...
28.1. 결정적인 건 디테일이다. 테마들을 태워버리면서 뜨겁게 타오르는 디테일. 그렇게 화인처럼 가슴에 찍히는 디테일.
28.2. 아도르노의 ‘말러’를 읽는다. 아도르노답지 않아서인가, 단어 하나가 가슴을 찌른다. ‘긴 세월’. 긴 세월은 어떤 시간일까. 이제는 끊어져야 하는 시간일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이어져야 하는 시간일까.
29.1. 파스칼의 ‘팡세’ 강의를 해 달라는 메일 한 장을 받았다.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 서가에서 파스칼을 꺼내 읽는다. ‘헛됨 (Vanity)’의 장에 이런 단상이 있다: “그 사람은 강 건너편에 살고 있다.”
29.2. 비. 혼자 술. 잠들기 전에 거울 속을 오래 본다. 늘 예감으로 가득했던 6월. 그 6월이 간다. 내 인생의 한 시기가 끝난다.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한 시기가. 안녕, 혼자 인사를 보낸다
30.1. 다시 콜레트의 ‘여명’. 전에는 놓쳤는데 습격하는 문장이 있다: “비알은 몸을 숙이고 기름을 따랐다. 드러난 그의 가슴은 태양과 소금기로 빛나고, 피부는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 나는 잠시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마치 말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그는 나의 손을 바라보았다. 내 나이를 말해주는 손, 내 나이보다 몇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손... 하지만 나는 그 손을 치우지 않았다.” - 관능이란 무엇일까. 그건 ‘만지고 싶음’이다. 이 문장은 '만지는' 문장이다, 관능이다. 그러나 이 관능은 문장이다. 문학이란 뭘까. 그건 문자에 대한 관능이다. 육체 대신 문자에게 타 오르는 관능. Perversion. 이 변태의 관능은 그런데 또 다른 관능을 발견하게 만든다. 놓음의 관능. 애착이 붙들음이라면 놓음도 애착이다. 예컨대 오늘 새벽, 빗속의 풍경 안을 걸을 때 나를 황홀하게 했던 건 두 가지다. 하나는 놓음. 또 하나는 이 놓음의 뜨거운 관능. 놓는다는 건 금욕이 아니다. 그건 또 다른 애착이고 관능이다. 지금, 아니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찾고 내게 필요했던 것, 그것은 이 관능이 아닐까.
30.2.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이 배달되었다. 영화 특강이 있으니 <붉은 수수>를 읽어야 한다. 뮤즈가 아니라 원혼들에게 바치는 권두언이 있다: “삼가 이 책이 제 고향의 일망무제한 들판을 온통 시뻘겋게 물들인 수수밭 사이를 떠도는 영웅들의 혼과 한 맺힌 원혼들을 불러 모을 수 있기를 바라옵나이다. 저는 당신들의 불초한 자손입니다. 간장이 스며들어 절여진 제 심장을 기꺼이 도려내어 곱게 다져서 세 개의 대접에 담아 수수밭에 진열하였나이다. 삼가 엎드려 바라옵건대 하늘과 땅의 신령께서는 이 제물을 받으소서 (尙饗)!”
30.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정리한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 ‘두 영원회귀: 늘 똑같은 것의 돌아옴 vs. 늘 새로운 것의 돌아옴’/ ‘es muss sein vs. es koennte sein’/ ‘섹스 홀릭 vs. 역사 홀릭’/ ‘환멸의 두 유형: 냉소적 낭만주의와 비판적 낭만주의’/ ‘사랑에서는 매달리지 않기, 정치에서는 매달리기’/ ‘커플 구성의 퍼즐 풀어내기’/ ‘사랑의 가벼움과 정치의 무거움을 혼동하지 않기’/ ‘니체, 쇼펜하우어, 프루스트의 징후들’ 등등.
30.4. 사이사이 내습하는 강박: 애착과 집착의 경계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