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마지막 책 - 부상하는 현재

<떠난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by Taehun Roh

영국인 작가 줄리언 반스는 소설이나 에세이 속에서 주인공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내가 틀렸다"라고. 자기 확신을 내려놓는 용기. 삶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용기. 거대한 어떤 것 앞에서 필연적으로 패배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통이나 힘든 것을 감내하며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삶과 사랑에 대해 말하는 용기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줄리언 반스의 마지막 책(작가의 절필 선언)은 이런 번뇌로 가득한 삶에서 작가가 생각하는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 사람과 운명과 사랑은 무엇인지에 대한 궁극의 지향점이다.

줄리언 반스의 마지막 저서 영문 원제는 <Departure(s)>로, 한국어판 제목은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다. 자전적 소설이자 에세이를 표방한 이 작품은, 이제 삶의 마침표를 향해가는 작가가 사람과 사랑, 인생 주변부를 어떻게 응시하는지 밀도 높게 보여준다. 이 책은 독자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삶의 기준을 서서히 흔들며, 주변부와 전면을 오르내린다. 작가의 무언의 독백. '자, 이제 모든 것을 들려주겠다'라는 느낌으로 리듬감 있게 서술한다.

이야기에서 과거는 늘 현재로 소환된다. 현재는 다시 과거 속으로 뒤엉킨다. 오지 않은 미래는 걱정이나 불안과도 접목한다. 한 인간이 지닌 기질과 운명은 마치 죽음이 다가오는 방식처럼 어찌할 수 없는 숙명도 내포된다. 줄리언 반스는 이러한 과거-현재-미래에서 한 발짝 떨어져, 이들을 외면하지 않은 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시간과 삶의 이야기를 현재라는 무대에 부상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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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작가인 줄리언 반스와 겹쳐 있다. 실제 소설 속 이름도 줄리언 반스로, 노년에 문턱에 들어선 그는 자신의 몸에 생겨나는 변화와 지병을 인식하며 과거의 시절을 떠올린다. 젊은 시절의 사랑, 연애라는 감정의 온도, 선택과 후회, 그리고 기억의 파편들. 그것들을 현재라는 무대로 하나씩 소환한다.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묻혀 있던 연애 사건이 떠오른다.

학창 시절의 친구이자 연인 이었던 스티븐과 진, 그를 중매 해준 작가의 40년 전 사랑 이야기. 스티븐은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 진을 잊지 못한 채 살아왔다. 스티븐의 부탁으로 줄리언은 우연을 가장하여 두 사람의 재회를 주선한다. 사랑은 40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한 뒤 어떤 빛깔로 다시 나타나게 될지 작가를 포함하여 모두가 궁금해지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원제 <Departure(s)>는 '떠남'을 상기시킨다. 누구에게나 지나간 사랑과 우정이 있다. 하지만 건강이나 젊은 시절과 같이 그것들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삶을 과거라는 층위로 살아가며, 그 과정 속에서 떠나감을 받아들이며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사람은 때론 기억을 조작하고, 사랑을 재구성하기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다.


이 신화적 서사에서 줄리언 반스는 개인의 소중한 일화와 삶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소설 속 서두 부분에서 프로스트의 마를렌 이론을 다음과 같이 비틀면서 시작한다.


'들어봐. 내가 살아보니,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순수하게 소환되는 기억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어. 기억은 조작돼. 끊임없이 현재라는 영양분을 섭취하면서 말이야.'


사람은 양면성을 지닌 존재인데, 40년 간극을 두고 다시 만난 연인들 역시 그렇다. 돈키호테처럼 얽힌 삶과 기억은, 과거의 사랑을 현재에서 다시 요동치게 만들기도 하며 한편으론 불안하게 만든다. 이 재회를 가능하게 한 줄리언 반스는 이들과는 별도로 자신의 삶을 더 깊게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그 안에는 따뜻한 사랑도 추억과 같은 다시 돌려내지 못할, 다시 돌아가지 못할 소중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줄리언 반스는 누구나 마지막으로 주어진 건 죽음이라고 담담하게 읊조리며, 죽음을 응시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여유로운 용기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독자에게 보낸다.


행복한 시간은 그 순간에 소진된다. 어느 소설에서 말한 것처럼 삶의 화양연화는 타버리고 난 후 남는 것은 남고, 사라질 것은 사라진다. 모순적이고 편협한 인간의 감정은 과거를 늘 변주한다. 하지만 감정은 우리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장소로 데려다 주기도 한다.


소설가와 주인공의 경계에 있는 주인공은 독자와 개인적인 신뢰감과 유대감을 올려가며 이야기가 사실인지 소설인지 모르는 진실의 경계에 있는 느낌을 받는다. 과거의 행복과 고통으로 가득했던 사랑이 현재로 부상할 때 그 빛은 어떤 프리즘을 통과하게 될지, 무슨 색을 낼지 읽는 이들은 호기심을 가질 것이다.


한국어판 제목처럼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떠나간 것들이 층위를 소중하게 쌓여 이루어진 각각의 존재들이다. 소중한 것은 현재나 미래에 떠오르지 않고 기억 속 어둠에 잠겨져 있을지 모르더라도 어딘가 분명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기억의 아카이브가 함께했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저장되어 있을 수도 있다.


줄리언 반스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악보의 음표처럼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정제하고, 불필요한 것은 가감 없이 여백으로 만들어낸 마지막 책을 집필했다. 그리고 삶이라는 소중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친애하는 독자에게 울림 있게 건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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