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디트 헤르만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
모든 이야기에는 첫문장이 있다. 첫문장으로부터 모든이야기가 시작된다.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은 자신의 심연으로 들어가 적어도 쓰는 순간에는 관계의 절연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창작한다. 이번에 소개하는 책은 아무 페이지를 펼쳐 들어도 이런 작가의 심연으로 깊이 빠르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매혹적이다. 70년생으로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디트 헤르만은 냉철하게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아픔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자전적 에세이 <말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에세이>는 작가가 개인의 숨기고 싶은 삶의 사건들을 써낸 작품이다. 시작부터 속삭이듯 저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그녀를 작가로 만든 사건, 섬세하면서 칼날 같은 문장, 우정과 아픔과 사랑에 대한 고백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삶의 자리마다 힘겹게 겪어낸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일화들을 보는 시선은 따뜻하게 밀려오는 아침 해안가의 파도처럼 단아하고 아름답다.
▲유디트 헤르만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독일 소설가. 197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이책 <말해지지 않은 에세이>은 가장 사적인 이야기를 담은 그녀의 첫 자전적에세이로 2023년 빌헬름 라베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가족, 관계, 사랑, 운명, 트라우마, 코비드 펜데믹 상황등 전방위적인 것을 다룬다. ⓒ 노태헌 관련사진보기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는 세가지 연결된 이야기를 통해 감정을 화자인 작가가 정면으로 응시하며 시작한다. 픽션 에세이 같은 상상력을 동원하게 만드는 이번 글을 잘 들여다보면 글쓰기가 왜 특정한 사람-작가에게 태동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글쓰기의 재료를 하나로 모아 실제의 사건과 머릿속 세상, 그리고 덧붙여 상상의 세계를 개인의 일기에 담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가족, 연인, 친구와 있었던 생에 주요 사건들을 담담하게 독백하듯 말하며 문장은 때로 파괴적일 만큼 강렬한 효과를 낳는다.
작가의 젊은 시절, 작가로서의 태동기에 그녀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였던 매력적인 아다와 변덕스러운 친구였던 마르코가 있었다. 피로 얽혀진 운명적 가족과는 틀리게 그 시절 두 친구는 선택된 가족이었다. 개성과 자아가 가득한 친구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작가에게 말하면서도 때론 강요했고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영향아래서 그녀는 과연 중요한게 무엇인지, 기억과 글쓰기가 무엇이 되는지 각성하기 시작한다.
책의 초반부 베를린 밤거리에서 오랫동안 그녀의 심리를 상담했던 정신분석가와 우연히 재회한다. 작가인 화자는 자정의 될시간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적인 매혹적인 밤속으로 들어간다. 작가는 아마 한때 사랑에 빠졌다가(빠졌다고 느꼈다가), 다시 식은, 언젠가는 끝날 운명이었던 정신분석을 중단해버렸던 정신분석가에게 무엇을 묻고 싶었던것인가.
허름한 술집에서 진토닉 두 잔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박사면서 남자였던 사람에게 질문을 가한다. 왜 수년간의 오랜 분석 기간 동안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지? 심리분석을 중단하고 그녀가 완성한 그의 사무실로 보냈던 그녀의 책을 그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렇다면 그녀에게 정신분석은 글쓰기와 맞닿아 있엇던 것이었는지. 수많은 독자의 알 수 없는 반응과 같은 것처럼? 삶에서 무의식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묻는다. 이어지는 박사의 대답.
그녀의 글쓰기 중심에 여러 트라우마가 있었음을 챕터마다 고백한다. 그냥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은 살아감의 근원적인 질문이나 답이 될 수 없다고. 개인마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으나 상처나 아픔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가 솔직히 힘들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주요 사건들이 전개되는 삶속에서 무엇이 소중했던 것인지 용기의 형태를 갖추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가슴속 담고 살아가는 아픔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이야기한다.
작가의 트라우마는 그녀의 아버지이며 조국인 독일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정신 질환과 그것이 어머니에게 남긴 상처로 산산이 부서진 어린 시절, 그리고 독일의 과거라는 그림자가 청년기에 있었다. 종국에 작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아직 분단되어 있던 베를린을 가로질러 떠났던 여행을 묘사하는데 지하철이 동베를린 아래를 지나간다. "불길하게 갈색 빛이 어른거리는 유령 역들을 통과하며, 잔해가 흩어진 승강장, 부서진 기둥에 기대어 기관총을 든 채 서 있던 군인들." 그것은 마치 꿈속 장면과도 같은 이미지들이다. 스스로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한 국가의 무의식처럼. 국가와 가족과 사회 개인에게 주는 영향들.
인간 상황에 대한 흔들림 없는 탐구를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며 자신을 외부에서 성찰하기는 쉽지 않다. 유디트 헤르만은 글쓰기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한적이 있다. 이는 비단 글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시작해요. 하지만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단 한 번. 처음에 제대로 해야 해요."
태어남 이후로 살아냄의 시간동안 우리는 무언가를 한다. 누구나 각자만의 해내기도 실패하기도 하는 시간동안 살아있는 것을 감각하고 자신만이 가진 소중함의 세계, 의미로 가득찬 세계를 만들어간다. 유디트 헤르만은 글쓰기를 통해 그런 살아있는 생생한 세계의 문을 여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대입해 본다. 하루의 일을 기록한다. 그저 문장을 쓰기 시작 한다. 그냥 나아간다. 그저 좋아한다. 솔직하게 삶에 답한다. 그렇게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