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번호 10번의 에이스
여러분은 ‘조막손 투수’ 짐 애보트를 아시나요? 짐 애보트는 오른팔이 손목 부분까지만 자란, ‘조막손 장애’를 앓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미국의 금메달 획들을 이끌며 메이저리그에 입성했고 에인절스와 양키스 등을 거치며 활약한 투수입니다. 1993년엔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을 정도로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 인간 성공‘의 신화로 불리는 선수이기도 합니다. 그의 어록인 "모든 희망이 없어질 때까지,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장애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습니다."는 많은 선수들에게 희망을 주는 문구였고 그가 던지는 공들은 수많은 이들의 꿈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짐 애보트처럼, 고시엔에도 아픔을 가지고 마운드에 올랐던 선수가 있습니다. 난치병을 앓고 있었지만 꿈으로 향하는 과정이라 생각했던, 오히려 병을 이겨내고 고시엔에 서는 것을 꿈꿨던 선수, 2007년 아이쿄다이메이덴의 시바타 쇼고의 이야기입니다.
시바타 쇼고는 투병을 시작한 이후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시바타 쇼고가 앓았던 병은 ‘베쳇병’으로, 이는 전신의 혈관에 염증이 발생하는 만성 질환이며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이나 치료법이 밝혀지지 않은 난치병입니다.
신체적 스트레스 같은 것들이 병에 좋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무리를 해서는 안 되는 질환이기도 했습니다. 발병은 중학교 3학년 때의 봄, 4개월 동안의 입원으로 60kg였던 체중은 48kg까지 빠졌고 의사는 야구를 계속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의 시바타는 “억울해서 왜 나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야구를 그만뒀다면 그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괴롭지만 노력해서 고시엔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난병을 극복해서 고시엔에 가고 싶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야구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난치병을 짊어진 선수를 받아줄 학교가 있는가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여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국제패, 중학생 때는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한 그였지만 발병 이후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아이치의 강호, 아이쿄다이메이덴이었습니다. 난병을 짊어진 선수를 받는 것은 메이덴으로서도, 후라노 감독으로서도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메이덴은 훈련강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기에 무리해서는 안 되는 선수를 받는 것은 생각보다 큰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입부 후 반년 간은 제대로 된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으나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시바타의 열정에 감동한 후라노 감독은 “꿈이란 것은 이루기 어렵지만, 너의 목표는 노력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현실이다.”란 메시지를 남기며 그를 독려했습니다.
입부 후 1년이 지나 계속해서 노력한 결과, 조금씩 동기들의 훈련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중학교에서 배터리를 이루었던, 선배였던 오자와 카즈키와 함께하며 조금씩 희망을 키웠습니다. 그렇게 춘계대회를 목전에 두고 등번호 10번을 받게 된 시바타는 드디어 다시 경기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병을 이겨내고 자신의 야구를 되찾은 듯했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잔혹했습니다. 등번호를 받은 당일, 갑작스러운 통증에 훈련을 중단했고 오버워크(무리)때문인지 다시 난치병이 시바타를, 그의 야구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춘계대회를 앞두고 긴급 입원을 하게 됐고, 결국 춘계 대회 때 아이쿄다이 메이덴의 등번호 10번은, 다른 투수가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야구를 좋아하니까, 열심히만 임한다면 야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던 소년의 기대와는 다르게 현실은 차가웠습니다.
입원한 지 한 달이 지나 시바타는 학교에 돌아왔습니다. 2006년, 여름 고시엔 예선을 앞두고 팀이 스퍼트를 올리고 있던 때에 시바타는 훈련장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라운드 한 편에서 그라운드 정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야구를 시작한 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훈련 명단 제외였습니다.
투병 이전까지는 계속해서 주전이었던 그였기에 분함이 컸지만,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선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치병과 싸우는 시바타에 응답한 것인지, 아이쿄다이 메이덴은 고시엔에 진출했습니다. 시바타는 스탠드에서 베쳇병이 아니었다면 분명 섰을 꿈의 무대에 선 동료들을 응원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쿄다이메이덴은 후쿠치야마세이비(교토)에 1차전 패퇴하며 승리에 손이 닿지 못했습니다.
패퇴 후 3학년들은 기숙사에서 짐을 뺐습니다. 시바타는 같은 꿈을, 함께 백구를 좇았던 선배들과의 작별에서 선배들의 마지막 여름에 힘이 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던지고 달리고 싶었으나 과한 훈련은 그에게 무리였고, 2개월에 한 번 있는 정기검진에서 나오는 수치를 보고 훈련량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절하게 기다린 가을 대회를 앞두고 괜찮은 수치가 나와 대회에서 던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첫 공식 경기의 엔트리에 들어간 이후 카이세이와의 도카이 지구 대회 2차전, 1대 0으로 뒤지고 있던 3회에 시바타가 등판했습니다. 갑자기 등판한 책임감이 막중한 상황에서 3자 연속 삼진을 잡아내며 공백이 있었다고는 생각 못할 정도의 피칭을 선보였습니다. 역전한 이후 맞은 최종회, 7이닝째 투구를 이어오던 시바타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동점 적시타를 맞았지만 시바타는 계속해서 마운드를 지켰습니다. 9회 말 2-2 동점, 2사 만루 풀카운트, 봄 고시엔으로 향하는 혼신의 1구의 결과는 밀어내기 볼넷. 그렇게 봄 고시엔 출장은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난치병을 극복하고 고시엔으로 간다는 자신의 길을 자신이 막은 것 같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고시엔으로 향한다는 그의 꿈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2007년, 시바타에게 있어 마지막 여름. 운동장에는 동기들과 같이 힘든 훈련을 견뎌내는 시바타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여름, 그에게 망설임은 없었습니다. 여름 엔트리에 또다시 10번으로 벤치에 이름을 올렸고 지면 끝인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시바타는 매해 있는 영상편지 행사를 통해 숨겨왔던 자신의 투병사실을 밝히며 동료들과 함께여서 버텨올 수 있었단 말로 마음을 전했습니다.
준준결승, 준결승, 그리고 결승에 차례로 구원등판하며 팀을 이끌었고 결승전에선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며 그렇게 직접 고시엔행 티켓을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2007년 8월 11일, 시바타는 그토록 바라던 꿈의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전력으로 공을 던지고, 전력으로 3루까지 내달리는 모습은 그가 투병 중이란 사실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꿈의 무대에서 시바타는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팀의 유일한 타점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아쉽게 3대 1로 패하며 시바타의 짧은 꿈의 무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고시엔을 뒤로하던 그의 모자챙엔 ‘모두들 덕분’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동료들 덕분에 고시엔에 설 수 있었다던 시바타는 메이지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요미우리의 육성 3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프로 생활을 오래 지속하진 못했고 현재 그는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세계의 많은 어린이들이 야구의 꿈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가 고시엔으로 향하던 길에 많은 이들이 있던 것처럼 그도 누군가의 꿈의 길에 서있습니다.
그의 투구는 단순한 공이 아닌 누군가에게 있어 꿈이고, 희망이고, 감동이고, 낭만이고, 미래였습니다.
난치병을 이겨내고 꿈의 무대에 선 시바타 쇼고처럼,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이뤄내길, 함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오늘의 고시엔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