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7년의 기다림

도호쿠의 비원

by 야구소년
염소의 저주를 끊어낸 시카고 컵스. C. 뉴욕 타임즈

2016년 10월, 야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저주의 사슬이 풀렸습니다. 바로 시카고 컵스가 1908년 이후 108년 만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인데요, 이른바 ’염소의 저주‘로 불렸던 징크스를 끊어내고 마침내 팬들의 오랜 숙원을 끊어낸 컵스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평균 수명이 약 80세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일생동안 컵스의 우승을 본 이들은 상당히 운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 MLB 입문 또한 2016년이었는지라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꽤나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느린 타구가 브라이언트에게 향했고, 브라이언트의 송구가 리조에게 향하며 경기가 끝났을 때, 리조, 알모라 주니어, 바에즈, 러셀 등 지금은 컵스에 없는 많은 이들의 웃음이 카메라에 잡혔던 것이 생생합니다. 아마 이러한 기억이 생생한 건, 그만큼 기다렸던 시간이 간절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전 처음으로 본 MLB 경기가 컵스의 월드시리즈였기에 다른 팬분들에 비하면 간절함은 적었겠지만 컵스라는 팀의 이야기를 듣고 저도 모르게 간절하게 경기를 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기다림은 우리를 애타게 합니다. 기다림만큼 어려운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기다림은 우리를 애타게 하고, 설레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기다린 만큼 기다림의 끝에 있는 만남은 기다렸던 순간들을 후회 없게 합니다. 고시엔에도 이러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컵스의 108년에 버금가는 무려 107년의 시간,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도호쿠(동북)?

도호쿠 지방. C. 나무위키

도호쿠(東北)는 일본 8개 지방 중 하나로, 아오모리, 이와테, 아키타, 미야기, 야마가타, 후쿠모리의 6개 현을 포함하고 있는 일본의 동북에 위치한 지방입니다. 2011년,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아픔을 가지고 있기도 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픔만을 간직한 지역은 아닙니다. 미야기의 라쿠텐 골든 이글스와 베갈타 센다이 등 많은 스포츠 팀들의 연고지로 스포츠 팬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 중 하나이며 센다이 이쿠에이, 도호쿠, 하나마키 히가시, 등 일본의 명문 고교야구팀이 속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에 더해 많은 분들께서 알고 계시는 배구 애니메이션 [하이큐!!]의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이곳, 미야기가 속한 도호쿠입니다. 이에 더해 오타니 쇼헤이, 키쿠치 유세이, 나카노 타쿠무, 등 유명 야구선수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하나마키 히가시 시절의 오타니 쇼헤이 C. ap 뉴스

우승과 연이 없던 도호쿠

이러한 도호쿠이지만 고시엔 우승과는 연이 없었습니다. 1915년, 처음으로 시작된 고시엔(당시 전국중등학교 우승야구대회)에서부터 아키타 현의 아키타 중학교(현 아키타 고교)가 결승에 올랐지만 연장 13회의 접전 끝에 결국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이로부터 54년이 지난 1969년, 아오모리 현의 미사와 고교가 에이스 오오타 코지를 앞세워 결승에 올라 마츠야마 상고의 에이스 이노우에 아키라와의 진검승부를 펼쳤습니다. 결승전은 연장 18회가 되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고 재시합으로 진행된 경기에서 마츠야마 상고가 승리하며 오오타는 2경기 동안 무려 261구를 던지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다시 10년이 지난. 1979년, 후쿠시마 현의 이와키 고교가 신장 165cm의 ‘작은 대 에이스’ 타무라 타카츠를 앞세워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결승전에서 타무라는 1 실점으로 분투했지만 결국 팀이 점수를 내지 못하며 다시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1989년과 2001년, 미야기현의 센다이 이쿠에이가 결승에 진출하여 우승을 노렸지만 1989년엔 에이스 오오토시가 9이닝 무실점 호투했지만 연장에서 무너졌고 2001년엔 조소가투인과의 사투 끝에 패배하여 각각 2점, 1점이 뒤쳐진 채 패배하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도호쿠 고교 시절의 다르빗슈. C.재팬볼

2001년 센다이 이쿠에이의 앞을 가로막았던 조소 가쿠인(이바라키)은 2003년 여름, 다시 한번 미야기 현 대표팀을 여름 고시엔 결승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초고교급 투수 다르빗슈 유를 내세운 미야기의 도호쿠 고교. 도호쿠 지방에서 고시엔 결승에 진출한 팀 중 최초로 선취점을 내는 등 숙원을 풀어내는 듯했으나 다르빗슈가 4 실점으로 무너지며 다시 한번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6년이 지난 2009년, 이와테 현의 하나마키 히가시 고교가 초특급 에이스 키쿠치 유세이를 앞세워 봄 고시엔 결승에 올랐으나 키쿠치의 1 실점 호투에도 불구하고 타선이 침묵하며 1979년의 아픔을 반복한 도호쿠였습니다.

2011년과 2012년에는 아오모리의 코세이 가쿠인이 2년 연속으로 고시엔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2011년에는 당시 최강팀이었던 니치다이산(일본 대학 제3 고교)에 11:0으로 대패했고 2012년엔 후지나미 신타로를 내세운 오사카 토인의 봄-여름 연패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2015년엔 센다이 이쿠에이가 다시 한번 초특급 에이스, 사토 세나를 앞세워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도카이다이사가미를 상대로 139구의 열투를 펼쳤으나 최종적으로 10:6 패배하며 센다이 이쿠에이는 3번의 결승에서 모두 패하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가나아시 농고 시절의 요시다 코세이 C. 쿄도 뉴스

그리고 2018년, 가나아시 선풍을 불며 등장한 가나아시 농고, 에이스 요시다 코세이를 앞세워 요코하마, 오미, 니치다이산 등 일본 최고의 명문 팀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100회 대회라는 상징적인 해에 도호쿠의 비원이 이루어지나 기대했습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시골 변방에 위치한 농업고가 오래된 비원을 이루어내는 것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러나, 에이스 요시다가 준결승전까지 5경기 연속으로 완투하며 749구를 던져 힘이 빠진 것인지 요시다는 오사카 토인과의 결승에서 5이닝 12 실점으로 무너지며 도호쿠는 다시 한번 오사카 토인의 봄-여름 연패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도호쿠는 도합 11번의 고시엔 결승에 올랐으나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며 11번의 준우승에 그쳤고 도호쿠 지방 사람들의 ‘고시엔 우승’이라는 소망은 점점 멀어지는 듯했습니다.

2022년, 다시 센다이 이쿠에이

우승의 순간. C. 동경일보

코로나19로 대회가 중단되었던 2020년 이후 두 번째로 찾아온 2022년의 고시엔, 조용했던 관객석에 사람들이 돌아왔고 다시 브라스밴드의 응원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도호쿠 지방에서 각 현을 대표하여 고시엔에 출장한 6개의 팀 중 후쿠시마의 세이코 학원은 니치다이산, 요코하마, 츠루가케히, 규슈학원을, 미야기의 센다이 이쿠에이는 돗토리 죠호쿠, 아키히데 히타치, 아이쿄다이 메이덴을 차례로 이기며 4강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 건지 이 두 팀은 결승으로 향하는 4강 무대에서 만나게 되었고 센다이 이쿠에이의 18-4 대승으로 미야기의 센다이 이쿠에이가 도호쿠 역사상 12번째로 고시엔 결승 무대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림의 끝. C. 풀카운트

결승전의 상대는 우승 유력후보였던 시가의 오미고교를 제압한 시모노세키 국제고였습니다. 여름의 시작으로부터 107년이란 시간이 흐른 2022년, 다이쇼 시대에서 레이와로 넘어온, 시대가 변한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위한 결승전이었습니다. 센다이 이쿠에이는 3회 말 선취점을 시작으로 5회에 3:0 리드를 잡았습니다. 시모노세키국제고가 6회 초 한 점 따라붙었지만 7회 말 5번 타자 1루수 이와사키의 만루홈런으로 한 번에 앞서나간 이후 다시 한 점을 추가해 단숨에 리드를 7점 차로 벌렸습니다. 9회 초, 투아웃 1,3루 상황에서 느린 타구가 3루수에게 향했고 3루수 도구치의 송구가 1루수 이와사키에게 향하며 경기가 종료됐습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 그리고 마지막까지. 어찌 보면 컵스와 저주를 깼을 때와 비슷한 마무리로 마침내 107년의 오랜 숙원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3루수 공을 잡았습니다, 시합이 끝났습니다! 여름의 시작으로부터 107년! 드디어 도호쿠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진홍의 대 우승기가 시라카와의 관을 넘어, 숲의 마을 센다이에 도착합니다! 미야기 대표, 센다이 이쿠에이, 첫 우승!”
-당시 중계 멘트

‘시라카와의 관’이란 도호쿠와 간토를 연결하고 구분하는 고대의 교통 중심지를 뜻하며 도호쿠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일본 문학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시라카와의 관은 먼 지방으로 여정을 떠나는 것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했으며 관문 자체는 현재 소실되었지만 도호쿠를 상징하는 것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시라카와의 관을 진홍의 대 우승기가 107년이란 시간을 건너 마침내 넘었습니다. 2022년, 센다이 이쿠에이의 우승은 단순한 우승이 아닌, 도호쿠 지방 사람들의 오랜 비원을 풀어내고 성불해낸 의미 깊은 우승이었습니다.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