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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반짝 빛나는 Jul 10. 2023

길을 걷다가 가방 지퍼가 열린 할머니를 만났다.

봄날의 어느 주말,

혼자 저녁 찬거리를 사러 근처 마트에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순간 내 앞에 조금 떨어진 거리에 낯선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할머니가 메고 계신 가방에 지퍼가 열려 있었다.

'어머! 물건 쏟아질라'

얼른 가서 지퍼를 올려드리려 발걸음을 재촉해 할머니 뒤로 바짝 다가갔더니,

가방이 지퍼가 열린 게 아니라 고장 났는지 옷핀 두 개가 양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옷핀은 임시방편으로 꽂아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중학교 때쯤 국민 책가방으로 유행한 디자인의 가방이었는데

케케묵은 때에  낡아서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고 아주 많이 닳아있었다.

게다가 아주 낡은 모자와 허름한 옷을 입고 계셨다.


순간, 지난번 형님이 주신 백팩이 번뜩 떠올랐다.

텍이 붙어있는 새 가방이었는데 메는 부분 아래에 작은 물방울 같은 얼룩이 튀어있어서 조카가 사용하지 않는다고 주신 가방이다. 하지만 나는 얼룩은 감당할 수 있겠는데, 색이 너무 청량한 민트색이라 감히 메지 못하고 집에 고이 모셔둔 가방이었다.


계속 할머니를 뒤쫓아 걸어가고 있는 사이 할머니는 우리 집 근처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으셨고 그 장면이 눈에 입력된 순간부터 장바구니를 안고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지금 가서 가방을 얼른 가져온다면 전해 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집을 향해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띠띠띠띠띡"-띠로리-

돌아온 아내가 급히 문을 열어젖히고 장바구니를 입구에 던져 놓고 큰방 드레스 룸으로 뛰어가자 남편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여보 길 가다 어떤 할머니를 만나서, 잠깐만 다녀올게요" 말하고 민트색 가방을 찾았다.

그리고 가벼운 봄잠바와 털이 탈부착되는 롱 점퍼를 (이것도 형님께서 당신 스타일이 아니라 사놓고 몇 번 못 입었다고 주셨는데 나 또한 입지 못했다. 검은색 점퍼만 입는 내겐 조금 부담스러운 아주 밝은 네이비 색이었다.)


집에 들어온 지 1분 만에 다시 밖으로 뛰어나갔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저 멀리 버스정류장 벤치가 보였다. 할머니를 눈으로 좇았다.

다행히 할머니께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계셨고 버스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뛰어가서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 혹시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이 가방을 드려도 될까요? 사용하실래요?"

라고 여쭙고 조심스레 가방을 건넸다.

할머니께서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시더니 건넨 첫마디가

"가방 안에 먼지 들어갈라, 가방문 닫아요"라고 말씀하셨다.

엥? 하고 내손을 보니 급한 마음에 백에 담지도 못하고 가방과 옷만 덜렁 들고 달려온지라 가방 지퍼가 입을 벌리며 내손에 매달려 있었다. 가방을 성급히 닫고는 얼룩을 설명드렸다.

다행히 할머니께서는 가방을 받으셨다.

그리고

"혹시, 이 옷도 필요하실까요?"라고 여쭸더니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옷은 괜찮아요."라고 답 하셨다.

"네~알겠습니다." 하고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혹시 집에 안 신는 욕실화가 있으면 내게 줄래요?"라고 말씀하셨다.

'헛, 욕실화? 욕실화가 있었나?'

아이들 때문에 욕실에 매트 생활을 해서 사용하지 않고 집에 방치해 둔 욕실화가 생각났지만 사용하던 걸 드리기엔 좀 그랬다. 그런데 우리 동네엔 신발을 파는 곳이 없다.

번뜩, 다이소가 떠올랐다.

"할머니, 잠시만 계세요. 제가 지금 금방 가서 욕실화 사 올게요"

그러곤 이번엔 털 달린 잠바와 점퍼를 가슴에 안고 뛰었다.

여기는 버스가 드물게 오는 동네라 할머님이 나를 기다리다 애써 기다린 버스를 놓치시면 곤란했다.

기다리는 버스가 몇 번인지 모르겠지만 버스보다는 내가 먼저 도착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또 열심히 달렸다.



다이소에 갔더니 생각보다 많은 욕실화가 있었다.

제일 튼튼해 보이는 미끄러움 방지가 잘 되어있는 욕실화를 골랐다.

그리고 건너편에 있던 마트에 들러 빵과 주스를 샀다.

쉬지 않고 동네를 뛰어다니자니 숨이 차고 땀이 났다.


저기 멀리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헥헥헥

"할머니! 욕실화요. 욕실화"

하며 반가운 마음에 얼른 건넸다.

그랬더니 할머니께서는 내 손에 든 욕실화를 보시더니

.

.

.

.

 미간을 찌푸리시며 말씀하셨다.

"아이고, 이렇게 구멍이 송송 뚫려있으면 어째~! 난, 이런 욕실화 안 신어요.

그리고 뒤에도 뚫려있네! 에고고 에고고 "

머쓱하게 빵과 음료수를 내밀었더니

"이런 거 우리 집에 많아요. 필요 없어요"라고 대답하셨다.

참으로 손이 부끄러웠다.

버스정류장에 서서 계속 할머니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얼굴이 붉어졌다.

게다가 정류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몇몇 사람들이 서 있었다.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이고

할머니의 불만을 계속 듣고 있었는데

"차라리 돈으로 주지, 돈으로..."

라고 말하셨다.

.

.

너무 급하게 뛰어나오느라 휴대폰과 카드밖에 없어서

사 온 것들은 드리지도 못하고

돈도 드리지 못하고

집으로 가지도 못했다.

더 솔직하게 그 상황에 정말 어찌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옆에 앉아계신 한 아주머니께서

"할머님, 이 돈으로 종이백도 사시고 욕실화도 사세요~"하고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할머니께 드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아주머니를 봤더니,

"할머니께서 저 가방 담아갈 봉투도 없다고 계속 중얼거리셨어요"

돈을 받은 할머니께서 드디어 내게 할 이야기를 멈추셔서

서둘러

아주머니께인지 할머니께인지 모를 인사를 허공에 꾸벅하고 빠르게 돌아섰다.



집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웃음이 났다.

'아니, 도대체 물 빠짐없는 욕실 신발은 어떤 거지?'

아까 여쭤나 볼 걸 그랬다.

'가방이라도 받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하필 이때 돈이 없어서, 에잇 참...'

아까 그 아주머니 괜히 나 때문에 만원을 것 같아 죄송했다.





종종 길을 가다 보면 도움이 필요한 할머니들은 만나게 된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나기도 했고,

울 할머니도 여름 되면 가장 좋아하 과일인 수박을 사서 시장에서부터   집에까지 혼자 오시기까진 분명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셨을 테니까...!

그런 마음에 비 오는 날 폐지 는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어드리기도 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드리기도 했다.

종종 급하게 길을 가야 할 땐

"할머님, 어느 길로 가세요?

제가 저~기 앞에까지만 들어드릴게요.

죄송해요.

제가 지금 어디 가는 길이어서 저 앞에 먼저 가서 둘게요. "

말하고 할머니 시선이 보이는 길까지 후다닥 짐을 들어다 드리거나,

아파트 계단 아래서 바퀴 있는 장바구니를 들고 올라오시는 할머님을 뵈었을 땐

" 할머님, 제가 지금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하는데 지각이라서요.  

위 계단 위에까지만 올려드릴게요.

천천히 올라오세요."

하고 장바구니를 낚아채 후다닥 계단을 뛰어올라가서 장바구니를 놓고 오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그런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 할머니들은 얼마나 당황스러우셨을까?

물건을 빼앗듯 들고 뛰어가는 내가 마치 도둑 같지는 않았을까?'

'급하게 선의를 베푸는 내 행동이 할머니들께  무례하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이제서 들었다.

너무 뛰어 기운 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행동들이 '내 마음 편하자고 내 위주로 베풀었던 선의, 혹은 오지랖'라는 생각에  민망함이 몰려오며 이유 모를 웃음이 났다.




'띠.. 띠.. 띠.. 띠.. 띡'

무슨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지 남편이 마중 나왔다.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시간은 어느덧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 밥 차려야 하는데...'

너무 늦은 저녁에 아이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배가 고프다고 소리쳤다.

쌀을 안치고 던져 놨던 장바구니에 재료를 주섬주섬 꺼내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9시에 저녁을 먹이고 10시에 아이들을 재웠다.



하,

저녁이 참 길었다.

아이들을 재우며 생각했다.

 앞으론 선의든 오지랖이든 적당히 상황을 봐가며 부려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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