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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반짝 빛나는 Jul 09. 2023

커피를 줄여야 합니다.

내겐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질병이 하나 있는데

바로 빈혈이다.

나는 단 한 번도 헌혈을 해본 적이 없다.

대학교 때 헌혈버스가 와서 친구들과 우르르 공짜 영화를 보자고 들어갔었는데 바로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내 빈혈은 다행히도 철분이 부족해서 생긴

'철결핍성 빈혈'이라

철분제를 잘 복용하면 수치가 올라가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주 아주 느리게 오르긴 하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약간의 두통을 달고 사는 일은 일상적이었지만,

두어 번 기절한 적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우아하게 사르륵 쓰러지면 되는데 그러지 못한 게 문제였다.

초등학교 때 집 베란다에서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하고 일어섰는데

머리가 핑~돌고 어질어질하던 순간,

기억을 잃고 눈을 떠보니 베란다 장독대옆에 누워있었다.

이날, 장독대에 머리라도 박았으면 그야말로 큰일이 날 상황이었다.


중학교 때, 체력장 오래 달리기를 하던 중 반드시 완주는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열심히 뛰고 있었는데,

눈떠보니 누군가의 부축을 받고 트랙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엄마는 내 빈혈을 고치시려고 수시로 병원엘 가고 수치를 확인하며 관리해 주셨다.

하지만 약을 먹어도 쉽게 오르지 않은 빈혈 수치는 7점대...

그때 의사가 딸을 죽일 거냐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실비도 없던 그 시절

엄마는 빈혈에 좋다는 고가의 철분제인 하루 한 병 마시는 작은 유리병으로 된 비싼 빈혈약을 사주셨다.

소간을 계란물에 묻혀 전을 부쳐주시고 영양가 있는 음식들을 챙겨주시고

넉넉지 못하고 바쁜 형편에서도 내 빈혈을 낫게 하시려고 많은 애를 쓰셨다.




내 학창 시절은, 자주 피곤했고 잠도 많았고 무기력했다.

학교에서도 맨날 잠만 자니

반에서 상위권 우등생 시절엔

집에서 밤새 공부하냐는 소리를 들었고

고등학교 성적이 급격히 하락했을 땐,

우리 반 부반장이 내 이름을 친절히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빛나야, 우리가 사는 동안 잠만 자는 시간이 25년 정도 된다고 해.

그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니? 잠은 무덤에서도 충분해" 라며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었지만,

나는 내가 늘 게으르고 정신력이 부족한 아이라고 스스로 자책했었다.

 



빈혈이 걱정되었던 결정적 시기는 임신과 출산 때였다.

이 정도 빈혈 수치로는 출산 시 수혈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임신바우처를 임신초기에 철분 주사를 맞는데 다 소진해 버렸다.

비싼 철분 주사를 맞고 철분제로인한 극심한 변비를 이겨가며 신경 쓴 덕분에

두 아이 출산 때 다행히 수혈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빈혈은 나를 지독히 따라다녔다.

출산과 육아로  너무 피곤해서 당뇨 인가 싶어 혈당 검사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피곤과 무기력과 유난히 쏟아지는 잠, 만성 피로는 내 고질적인 질병 빈혈로 인해서 라는건

아주 늦게야 알았다.



지난달 국가 건강 검진을 했다.

여전히 빈혈수치는 낮은 8.6

덤덤히 결과를  듣고 있으니

''지금 당장 수술할 일이 생기면요,

병원에서 수술하기 싫어할 거예요.

그 정도예요!'' 나보다 더 걱정하시며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다행인지 빈혈 말고는 특별히 아픈 곳이 없었지만

요즘따라 더 피곤해져서 당수치를 또 여쭸더니

당수는 아주 정상이며

내가 피곤한 이유는 빈혈 때문일 거라고 이야기하셨다.



빈혈에 커피는 좋지 않다.


그 이유는 커피 속에 함유된 '탄닌'이라는 성분이 철분의 흡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낮은 철분의 체내 흡수율을 커피가 더욱 떨어뜨린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기호 식품 3가지를 꼽으라면

얼음, 커피, 김밥이다.

얼음은 중독 수준이고(이것도 빈혈 때문에 생긴 증상이 라고 한다)

커피는 하루 세잔~ 다섯 잔 정도 마신다.

특히 아이들이 잠든 후 육퇴의 꿀맛을 누려야 하기에

늦은 시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많아

11시에도 서슴없이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를 마신다.

안 그래도 빈혈이 심한 내가

더 악화시키는 길로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은

피가 부족하고 혈액과 산소공급이 뇌까지 잘 돌지 않으면

'치매'가 올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아예 끊을 수는 없다.

끊는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하루에 한잔으로 줄여봐야겠다.


지금껏 살면서 빈혈이 내게 준 가장 큰 시련은,

지금 바로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줄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지금 나는 당장,

커피를  끊...  

아니,

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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