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미황사, 녹우당
녹우당을 먼저 들러야 했는데 대흥사로 와 버렸다.
동선이 꼬였다는 걸 미황사에 가서 알았다. 녹우당을 건너뛸까 했는데 가길 잘했다. 대둔산에 있다 하여 대둔사라고 불렸던 대흥사는, 초의선사와 김정희, 김정희와 이광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다.
안내글을 보면서 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중, 절친인 초의선사가 머물고 있던 대흥사에 들른 김정희가, 어떻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이광사의 글씨가 대웅보전 현판에 걸려있을 수 있느냐며 호통을 치고, 이광사의 글씨를 내리게 한 후 자신의 글씨를 걸었다. 이광사는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 고유의 글씨체를 만들었던 옥동 이서의 ‘동국진체’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훗날 유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자신의 글씨를 내리고 이광사의 글씨를 걸게 했다는 것이다. 유배 생활을 통해 겸손해지고 미덕을 쌓은 김정희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일화다.
천불전이 대승불교의 사상에서 나왔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대흥사에는 서산대사와 정조에 관련된 표충사의 이야기 또한 얽혀 있는데, 표충사의 편액은 정조의 친필로 내린 것이라고 한다.
미황사에서 대웅전에 새겨진 산스크리트어를 보지 못했다. 안내글에서 본 것이 왜 기억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다시 가기엔 갈 길이 너무 바쁘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해남 윤씨의 고택 유적지는 고산 윤선도의 가문 역사가 담겨 있다. 늘 그렇듯이 사진으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많아 아쉽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야 제맛이다. 그러나 잘못하여 욕심이 과하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녹우당 비자나무숲을 보고 싶은 마음에 비가 내리는데도 산에 오르다, 끝내 다 보지 못하고 땀과 비가 범벅이 되어 내려왔다. 그래도 이제는 비자나무를 보면 모를 것 같지 않다.
공재 윤두서의 초상화는 어디에서 많이 보던 것이라 눈에 익었는데, 그게 윤두서의 초상화였다는 걸 여기에 와서 알았다. 미인도가 있길래 ‘미인도도 해남 윤씨 가문에서 나온 것인가?’라고 생각했는데, 검색해 보니,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미인도는 신윤복의 것이었지, 윤 용이 그린 미인도가 아니었다. 역시 뭘 알아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비자나무숲에 오르다 보니, 가지들이 모두 한쪽, 비탈과 반대편 해가 비치는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자연을 보면 참 신기한 것이 많은 것 같다. 모두 이치에 따라 조화를 이루고 사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도 정해진 이치가 있을까? 있는 것 같은데, 마치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