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자녀를 사랑하고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집니다. 공부도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기 원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 잘 살았으면 합니다. 부모님이 바라는 일이 우리 아이에게 일어날 확률은 높은 편이 아닙니다. ‘엄친아’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많은 부모님이 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반증합니다.
부모님은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면서 존재로서 바라보는 것에서 멀어집니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가며, 행복한 가정을 이뤄야 더 사랑스럽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랑보다는 아쉬움과 걱정이 앞섭니다. 자녀의 행동 결과에 따라 대응 감정이 달라집니다. 어떤 감정이든 시간의 문제지 아이에게 전해집니다. 걱정의 대상이 된 아이는 자아 존중감을 잃어갑니다.
들뢰즈의 잠재태 현실태의 개념을 보면 잠재태에는 생명, 에너지, 힘, 존재, 실재계, 동물, 아이, 소수자, 혼돈 등의 개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실태에는 유기체, 형태, 양과 질, 존재자, 상징계, 사람, 어른, 다수자, 질서 등의 개념이 있습니다. 인간의 세상에서 언어가 생기고, 질서, 법, 윤리 등이 생기면서 질서 이전의 원시태의 삶들이 현재의 질서로 편입됩니다. 잠재태는 원시적이고 현실태는 합리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라캉의 말처럼 모든 생명은 많은 부분이 잠재태의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현재의 상징체계로는 잠재되어 있는 생명의 근원을 모두 질서로 편입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가치 평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조주의 철학의 관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시선은 존재자가 아닌 존재로, 유기체가 아닌 생명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은 태어나서 숨 쉬고, 먹고,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특정 집단을 위해 부응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부여한 관습적 행위입니다. 이것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근거의 역사는 너무나 짧습니다.
우리는 존재로서의 존엄에 대해 잊고 있습니다.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우리 아이, 치매에 걸린 부모님, 장애를 가진 사람, 소수자를 존재가 아닌 행위로 대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의 틀에 맞지 않으면 백안시합니다. Trick or treat!(사탕을 안 주면 장난칠 거야!)이라는 말이 떠 오르는 대목입니다.
가족에 대한 기대, 특정 개인에 대한 기대는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지구별의 당당한 구성원입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존재로서의 존엄까지 잊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 부모님, 소수자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 해당됩니다.
TV에소 본 장애를 가진 아이의 부모님이 말하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우리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는 데 부모로서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그래서 옷도 표정도 어둡다고 합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는 관계지향적이고 소득지향적인 삶이 크게 자리하고 있어 존재로서의 삶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힘들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지가 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존엄의 대상입니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칩니다. 우주 나이 138억 년, 지구 나이 46억 년, 인류의 역사 250만 년에 비하면 우리 삶은 찰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의 시간이 힘들다고 해도 한차례 바람이 지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존재로서의 가치에 무게를 두는 삶이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