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려 합니다. 두 달 전부터 일주일에 한 번 2시간 정도 달리고 있습니다. 거리보다 시간을 늘리고 늘린 시간에 익숙해지는 연습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2시간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무엇보다 지루함이 밀려왔습니다. 평소에 경험하지 않았던 시간이 되자 낯선 시간이었고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 않던 것을 하면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동요합니다. 오늘도 2시간을 달렸습니다. 무리 없이 2시간을 뛰었습니다.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한 시간 더 뛰어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익숙하지 않던 것이 익숙해지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10여 년 전에 1주일 단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배고픔에 대한 걱정이 많았지만 실제로 배고픔은 이틀 정도 지나 사라졌습니다. 그다음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이완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몸의 안과 밖 모두 평온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면서 여유가 생기면 일주일 단식을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연이어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 올랐습니다. ‘오늘 하면 안 될까?’ 물론 일주일 단식을 하려면 감식, 단식, 보식의 단계를 거쳐야 하기에 실상은 더 많은 날이 필요합니다. 지금 갑자기 일주일 단식은 무리가 따릅니다. 생각의 방향을 살짝 틀었습니다. 오늘 하루만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원래 아침을 먹지 않기에 아침에 대한 욕구는 전혀 일지 않습니다. 오후에 먹고 싶었던 것이 있어 살짝 흔들렸지만 금세 마음을 잡았습니다. 오늘 1일 단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점심과 저녁을 먹지 않으려 합니다. 아니 점심과 저녁 금식을 하려 합니다. 똑같은 말인 것 같지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으로 긍정적인 적극성으로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식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음식은 우리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지만 지금 시대는 에너지 과잉 공급인 경우가 많습니다. 신진대사가 온전히 작동할 수 있기에는 많은 음식이 필요치 않습니다. 음식이 우리 몸에 들어가서 에너지로 온전히 쓰이고 남은 것이 배출되기까지의 과정에는 많은 수고가 따릅니다. 우리 몸의 기관들이 자기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하고 협업이 필요한 경우는 협업을 해야 합니다. 과잉 공급된 음식으로 몸에 독소가 쌓이고 독소는 몸 안의 스트레스를 만듭니다. 지금의 식사는 완전 소화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불완전 소화는 어쩔 수 없습니다. 불완전 소화로 인한 독소에 익숙해진 몸에는 크고 작은 염증이 생깁니다. 자동차에 엔진오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빼내고 새로운 오일을 넣어 주어야 자동차가 제 기능을 다합니다. 우리 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음식의 과잉 섭취로 쌓인 노폐물을 배출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운동과 함께 음식의 섭취를 제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단식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운동으로 배출시키면 몸속에 필요치 않는 것을 빠르게 배출시킵니다. 우리 몸도 쾌적한 환경에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경험을 시켜주어야 본래의 기능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건강한 몸이 당연하지만 오랫동안 방치되어 그런 것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면 원래 그런 것이라 여깁니다. 독소, 염증, 스트레스로 가득한 몸속 환경을 새로 세팅해야 우리 몸도 본래 모습을 기억하게 됩니다. 익숙하지 않다고 계속 미루면 몸은 여러 가지 이유로 거부합니다. 배가 고프기 시작하면 ‘다음에 해도 되잖아’ ‘오늘은 2시간이나 달렸으니 제대로 먹는 게 좋겠어’ ‘평소에도 많이 먹지 않는데 단식까지 하면 살이 너무 빠질 수도 있어’ 갖가지 생각들이 익숙하지 않은 행동을 막아서려 할 것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비슷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 익숙해지려면 첫 번째의 실행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단식이 익숙하지 않은 실행의 첫 단계이기를 바라며 어그러지지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가정의 행복에 관심이 많아서 가정의 문제상황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중에서 아이의 게임에 대한 이야깁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게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스마트폰 게임에서, 컴퓨터 게임까지 어디에서나 아주 쉽게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길에서, 차에서, 전철에서, 식당에서, 카페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어디서나 게임을 합니다. 부모님과의 갈등은 제 할 일을 안 하고 게임이 우선인 생활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게임에 빠진 아이에게는 어떤 것보다 게임이 우선입니다. 밥보다, 잠보다, 공부보다, 숙제보다, 운동보다, 여행보다 게임이 우선입니다. 게임에 빠진 아이에게 공부를 하라고 숙제를 하라고 하는 것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갈등 지점입니다. 게임은 중독의 대상입니다. 뇌에 작용을 틀어 놓기에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큰 동력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한 큰일이 없이는 스스로 그만두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럼 이 갈등은 업보로 가지고 가야 할까요? 중독이 그렇듯이 한 번 길에 들어서면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중독에 대처하는 지혜로운 방법은 중독성이 있는 행동을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족 모두 게임과 무관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친구들이 다 하는데 가능하냐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가족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습니다. 가정의 환경이 아이의 행동을 좌우합니다. 어떤 행동이든 시간에 놓입니다. 24시간 중 자는 시간, 먹는 시간을 빼고 나머지 시간을 어떤 행동으로 채울 것인지는 가정에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명령과 지시로는 어렵습니다. 보는 행동으로 아이의 행동은 자리 잡게 됩니다. 아이가 가정에서 보는 행동이 누구의 행동이겠습니까? 가정에서 보이는 행동이 아이의 행동입니다. 보이는 행동이 독서라면 그 행동이 아이의 행동이 됩니다. 그 행동이 시간을 점유하면 게임이 들어갈 공간은 없어집니다.
아이가 게임에 빠져 있다면 게임을 하지 말라는 말은 언성을 높여도 소용없습니다. 운이 좋아 게임을 그만두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한 균열로 다른 것이 비집고 나옵니다. 힘으로 인한 굴복감은 마음속에 벽을 쌓게 합니다. 마음속 벽은 좀처럼 비집고 들어갈 틈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게임하는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아무리 어려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면 아이는 진퇴양난에 놓입니다. 게임을 하는 아이도 게임을 하며 마냥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게임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게임에 빠져 있는 자신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보다 게임의 욕구가 강하기에 다시 게임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됩니다. 마치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 속이 너무 부대껴 다시는 술을 안 마시겠다고 다짐하지만 해가 지면 다짐은 온데간데없고 술자리에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중독은 해당하는 행동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의 온도차가 큽니다.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이 다르기에 갈등이 끝이 나지 않습니다. 중독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수순을 밟게 됩니다. 게임을 하는 아이의 마음은 늘 이런 상태에 놓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면 이에 대한 대응도 해야 합니다. 아이는 진퇴양난에 놓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의 선택은 한쪽의 신호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부모의 시선을 차단합니다. 이때는 모든 수단이 동원됩니다. 고함, 분노, 태만으로 다시는 자신을 건드리지 않게 합니다. 게임하는 아이와 시간과 장소로 타협하는 것은 술자리에서 술을 석 잔만 마시기로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입니다. 우리 아이가 해당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아이도 대부분의 아이들과 같을 뿐입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게임을 멈추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부모님의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 기다림의 시간은 길어질 뿐입니다. 게임은 지금 우리 아이가 선택한 자신의 일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게임하는 아이를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기는 게임을 하는 시간으로 인생을 채우고 있는 시기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1퍼센트 부자의 법칙’의 저자 사이토 히토리 씨는 부모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가 히키코모리라 걱정되십니까? 그냥 월급을 주지 않아도 우리 집을 잘 지켜주는 경비원을 두었다고 생각하십시오.” 히키코모리를 보는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히키코모리로 사는 아이가 행복하지 않은지는 깊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너무나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어 다양한 삶의 모습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아이가 걱정인지 그런 아이를 둔 내가 면이 서지 않는 것인지? 아이가 직장이 없어 집에서 먹고 자고 평생 게임만 하면 그 아이의 인생은 불행한 건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는 온전한 단독자입니다. 우리 아이가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되는 것이 싫다면 우리부터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생각이지만 익숙하지 않다고 품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꺼내야 제대로 볼 수 있고 제대로 봐야 지금까지의 길과는 다른 길도 보이지 않겠습니까.
익숙하기 위해서는 낯선 첫 지점을 지나야 합니다. 낯설다고 피하기만 하면 같은 길만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해법이 없다는 것에 길들여져서 불행을 훈장으로 달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 익숙함으로 향하는 첫 계단이 되는 날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