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창가로 드리워진 늦은 아침, 식탁에 앉아 집안을 둘러본다. 거실은 잘 정돈돼 보였고 주방과 나머지 공간도 웬만하다.
먼지도 눈에 안 띄니 오늘은 청소를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일어서다가 컵의 물을 바닥으로 쏟았다.
얼른 돋보기를 썼다. 나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온 노안 덕분에 돋보기를 써야 제대로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식탁 밑으로 내려와 물기를 닦으려는 순간, 뽀얗고 깨끗하게만 보이던 세상이 초점을 정확히 맞춘 민낯을 드러냈다.
청소를 생략하려던 식탁 밑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흘린 물을 따라 아이들이 떨군 긴 머리카락들과 뭔지 모를 알갱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것을 본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먼지를 따라가며 닦다 보니 온 집안을 다 닦게 되었다. 덕분에 집은 쓸데없이 깨끗해졌고 무릎과 손목은 욱신욱신하다.
청소란, 매일 힘들게 해도 티가 안 나지만 하루만 안 하면 금방 티가 나는 것. 이 생색도 안 나는 일에 나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살았다.
공해가 심한 도시의 아파트는 창을 열어 놓으면 어느 틈에 까만 먼지가 쌓인다. 시력이 꽤 괜찮던 나는 사정권 안에 들어온 그들을 쉴 틈도 안 주고 각종 도구를 이용해 치워 버렸다.
그러나 집에 들어온 먼지들을 하루 이상 견디지 못하게 하는 일은 무척이나 고달팠다. 체력도 좋지 못한 내가 이 벅찬 일을 왜 멈출 수 없었던 걸까.
내 눈에 걸러지는 것들은 빨리 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젊은 시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던 그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 나에게 얼마 전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하기 싫은 날에는 아예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나이 들수록 일하는 것이 힘들어지고 귀찮아지는 게 많아서인가.
깨끗하게 한다고 상을 받거나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몸만 축나는 일들을 왜 그리 열심히 했을까 후회도 된다.
그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했던
'적당히 지저분한 것은 면역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다'는 말을 중얼대는 나를 발견하며 웃기도 한다.
어쨌든 육체노동이 줄어든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나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의 도모를 위하여.
눈에 원시가 온 후부터 굴러다니는 먼지나 머리카락 등 작은 것들이 잘 안 보이기 시작해 청소하는 빈도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그렇게 몸이 편해지면서 나 나름의 합리화를 시작했다.
'이 정도면 깨끗하다.'라고.
그리고 안 보이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아니 안 보려 했다. 깔끔을 떨던 내가 서서히 지쳐가면서 몸도 마음도 편해지고 싶었나 보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니까.
눈이 어두워져 간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불편한 노릇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상생활, 인간관계에서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본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돋보기를 쓴 채 거울을 통해 보이는 내 얼굴에 당황한다.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주름과, 잡티와 기미들. 결코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너무나 친절하게 확대까지 하여 보여주는 돋보기 성능에 놀라며 또 한 번 좌절한다.
흐릿하게 넘기고 싶은 것들,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 보게 하는 그것.
책 볼 때, 생선 가시를 바를 때, 주방에서 요리할 때, 화장할 때.... 이 정도 선에서만 사용하면 요긴한 물건이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에서도 적당한 거리두기는 꼭 필요하다.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그냥 모르는 척 지나쳐 주는 것 말이다.
좋은 상대라도 가까이서 자세히 보는 일은 불편할 수 있다. 돋보기를 들이대는데 어찌 결점이 안보일까.
품어주고 싶은 이들을 볼 때는 돋보기가 필요 없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선명하지 않지만 내 마음의 행복은 선명해진다.
나는 지금 두 개의 세상에 살고 있다.
돋보기를 쓰고 보는 세상과 안 쓰고 보는 세상. 이것들은 각기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나이 들어가며 눈이 잘 안 보이게 되는 것은 신의 선물이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고 내려놓으라는, 보이는 만큼 느끼고 행동하라는, 내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 하라는 것이다. 오롯이 나를 위한 배려이다.
나는 이 선물을 달게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