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로 축축한 날들이 이어지자 빨래가 감당이 안 되었다. 요즘은 집집마다 건조기를 사용한다더라. 여름 장마철에 빨래할 때 그렇게 좋다고 하는데, 빨래에서 냄새도 안 나고 뽀송뽀송하게 마른다고 하는데, 우리 집엔 건조기가 없어서 빨래를 해도 빨리 마르지 않고 왠지 빨래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이참에 건조기를 사야 할까 봐.라고 남편이 들리게 에둘러 말해보아도 시큰둥이다. 빤히 쳐다보아도 무표정한 얼굴. 그럼 그렇지. 남자들이 빨래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할까. 그게 왜 필요한데?라고 되물으면 화가 날 것 같아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던 것이 어제저녁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 모아둔 이불들을 바리바리 차에 실었다.
'으~무거워라. 건조기가 있으면 이렇게 힘들이지 않아도 되는데... 매년 이게 무슨 고생이람.'
경차 뒷좌석에 이불을 한가득 싣고 빨래방으로 향했다. 도로는 어제 내린 비로 물웅덩이가 곳곳에 있고, 습기 머금은 공기는 이불을 옮기는 나의 몸을 더 무겁게 했다. 빨래방은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다. 눈치 볼 사람도 없으니 은근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제일 큰 세탁기에 이불을 넣고 적혀있는 순서에 따라 작동을 시켰다. 칙칙~쏴!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제일 큰 드럼세탁기가 돌아간다.
'버튼을 누르면 에어컨이 1시간 동안 작동됩니다.'
나는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둘러보니 고급 커피 자판기도 있다. 오~ 요즘은 빨래방이 좋아졌네. 나는 커피를 한 잔 뽑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격은 500원인데 맛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맛 같다. 이렇게 커피를 마시며 탈탈거리는 세탁기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새롭고 좋다. 왠지 깨끗해지는 저 빨래들처럼 내 기분도 맑아지는 것 같다. 시간이 좀 걸릴 것을 대비해 챙겨 온 책을 꺼냈다. 박노해 시인의 <눈물꽃 소년>이다.
'사람이 하나의 일을 두 마음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제. 갈라진 마음으로는 어떤 일도 이루지 못 하는 법이제. 기평아 잘했다. 상 타온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 손에 잡을 것이 마이크 뿐이겄냐. 꼭 잡아줄 것이 찾아오고 있을 거다.'
박노해 시인은 어릴 적 웅변을 했다가 상을 탄 뒤부터는 학교에서 써 준 원고를 읽었는데, 내 말이 아닌 원고를 읽기 싫어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후 강소천 선생의 시를 만나고 공책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그래, 일을 할 때는 하나의 마음만 가져야 하는데 나는 왜 싫으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들이 많을까. 싫어도 해야 되는 일이라면 좋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맞겠지. 좋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 아니면서 결과가 좋을 수 있겠나.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면서 사색도 해가며 책을 읽어본다.
빨래가 다 되었다는 경고음이 들린다. 문을 여니 향긋한 향기가 공기 중에 퍼진다. 나는 향기 나는 이불을 건조기 통으로 옮겼다. 그리고 건조기가 돌아가는 동안 다시 독서에 집중한다.
'그러나 조용한 시간이면, 어머니와 누나와 형은 여전히 아버지의 상여를 메고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몫의 슬픔과 상실을 지고, 각자 앞가림을 해나가느라 이전처럼 누구 하나 나를 바라봐 주고 안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하루 아버지의 부재가, 나를 지켜줄 보호막이 없다는 실감이 안개처럼 몰려들었다. 커다란 외로움과 불안감이 어린 내 안을 파고들었다. 아부지- 불러보아도 대답 없는 메아리만 울렸다.'
박노해 시인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그 슬픔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어느 날 아득한 마음에 마당 보릿대에 불을 질러 집을 태울 뻔했다. 글 잘 쓰는 시인의 서정적인 묘사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빨래방은 독서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구나, 이렇게 책이 잘 읽어지다니. 정말 뜻밖인데?
세탁이 끝난 이불들은 건조한 따뜻함을 주었다. 포근해진 이불들을 개키고, 다 마신 커피컵을 정리하고, 가져간 책을 가방에 넣고 빨래방을 나섰다. 문을 여는 순간 또다시 후끈하고 물컹한 바람이 지나가고, 차들이 쌩쌩 지나가고, 하교하는 아이들이 내 앞을 지나간다. 경차 뒷자리 가득 뽀송한 이불들을 싣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래, 이런 게 낭만이지. 고속도로가 생기면 더 빨리 갈 수는 있지만 풍경들을 감상할 수 없어 낭만적이지 않듯이 인생은 서두르는 것 말고도 더 많은 중요한 것이 있는데 놓치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는 길 한동안은 건조기가 부럽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