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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 May 10. 2024

전등을 보며

              


 "엄마, 전등 안 사 왔어? 이제 불도 안 와"

 “어머나, 정말? “

 딸아이 방이 캄캄해졌다. 며칠 전부터 깜박거리는 전등을 보며 교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내 머리도 깜박거리는지 마트에 갈 때마다 전등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도통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전등 없는 장바구니를 들고 집에 왔는데 나의 모습을 본 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의미 없는 손동작으로 스위치를 눌러보지만 딸아이의 말대로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진작에 불이 나가 한쪽만 쓰고 있는 부엌 등과 시간이 지나 누런빛을 내는 거실 등, 이제는 불이 들어오지도 않는 딸아이의 방을 번갈아보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웃들은 벌써 형광등에서 LED 등으로 교체를 했다는데 나는 예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이번 기회에 전등을 새로 갈아야겠다.'

 며칠 전 LED 등을 갈고 집이 환해졌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형광등보다는 등 가격이 조금 비싸지만, 수명이 길고 전기세도 절약된다는 말에 업체 전화번호를 받아두긴 했었다. 얼른 전화를 걸어 약속 날짜를 정했다. 약속 당일, 집을 방문한 업체 주인은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화장실과 현관 등까지 다 바꿔야 한다고 했다. 

 "여기 사신 지 얼마나 됐습니까? “

 ”15년쯤 된 것 같아요. “

 ”와~ 그럼 진짜 오래 쓰셨네요. 바꿀 때가 지났습니다. 안 어둡든가요? “

 집을 둘러보며 곁눈질로 견적을 매기던 업체 사장님의 말에 아직 쓸 만한 등도 있는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작업하는 김에 다 교체하는 것이 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부터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어둠이 느껴졌다. 전등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옅어져 점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냈을 텐데 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긴 세월을 보냈나 보다. 전등을 보다가 문득 미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불빛이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희미한 전등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오히려 사람이든 물건이든 시간이 지나면 자기 색을 잃고 반짝이는 빛이 줄어든다는 사실에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 같이 오랜 세월을 보냈기에 점점 어긋나는 싱크대 문짝을 보면서, 손때가 묻은 벽지와 희미해져 가는 전등을 보면서 저게 나이 들어가는 나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는 것이다. 색 바랜 전등처럼 나의 빛깔은 언제부터 희미해진 것일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살았던 삶이 점점 줄어드는 빛마저 눈치챌 수 없도록 내 눈을 가린 것은 아닐까. 한때는 찬란하게 빛났을 광채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직 빛과 같은 존재이길 바라지만 벌써 꺼진 전등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초조한 마음의 끝자락이 뿌리쳐지지 않는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 편향의 심리가 있다고 한다. 어둡다는 생각도 못 하고 살았다는 깨우침은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살아오면서 보았던 것들이 다 진실은 아니라는 것, 보았다는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는 뜻과 같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또한 낯익은 익숙함으로 보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격차는 벌어진다. 그림자가 길어진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시간의 격차를 문득 발견하는 순간의 당혹스러움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해 준다. 그러므로 익숙하다는 말은 무뎌졌다는 말을 의미한다. 익숙한 것이 괜찮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전등 바꾸니까 집이 훤하지? 그 집에 오래 살았으니 이제 하나씩 고쳐가면서 살 때도 됐지. 봄에 아이들 방 도배할 건데 같이 할래?"

 나보다 늘 한 발 앞서는 친구와의 통화를 끝내고 환해진 거실을 보니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진 기분이다. 이제는 익숙함을 경계하며 집을 잘 살펴야겠다. 그리고 집보다 오랜 세월을 보낸 나 자신도 잘 살피는 습관을 가져야겠다. 무뎌지지 않은 예리한 눈으로, 나의 빛이 줄어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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