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들면 조건없이 결혼하진 않을듯하다
어릴 땐 서른 살도 내겐 안 올 줄 알았다.
언제까지고 십 대 이십대로 남아있을 줄 알았다.
이젠 벌써 오십을 바라보고 있다. 세월 참 빠르다. 시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쉬지 않고 꾸준히 흘러간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존재다. 기다려 달라고 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나마 시간이란 녀석은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신랑은 공주 사람인데 나랑 결혼하면서 부산에 정착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부모사랑을 잘 모르고 자랐다. 신랑 어머니는 동생을 낳다가 동생도 엄마도 눈 뜨지 못했단다. 그게 신랑 네 살 때 일이었다.
엄마 얼굴도 기억에 없고,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단다. 슬프다.
하긴 난 부모가 있어도 차라리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존재니.
우린 서른에 결혼을 했고, 벌써 20년 되어간다.
결혼 후 공주엔 한두 번 갔었다. 신랑 친구들도 몇 번 못 만났다.
며칠 전, 신랑 친구가 연락이 왔다. 결혼한다고. 초혼이다.
친구는 공주사람이고, 신부 될 사람은 부산사람이란다. 친정은 부산이고 일을 공주에서 하는 중이란다.
사람의 인연이란 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한 거 같다.
"친구 직업이 뭔데? 이 나이에 결혼하는 거면 아무나랑 하진 않을 거고. 서로 웬만한 조건은 갖췄을 거 같은데."
난 현실적으로 물었다.
신랑친구는 군무원이고 현재 5급이란다. 7급에서 시작해서 경력 쌓고 시험 쳤단다.
그랬겠지. 살면서 깨달은 게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거.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다.
신랑 친구들은 결혼식 전날 부산 내려왔다.
정 없는 사람들.
부산에는 딸랑 신랑 혼잔데 몇 년 만에 만나면서 숙소 정할 때 신랑은 생각도 안 해 준거 같았다.
난 신랑 친구들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계산기를 몇 개씩 넣고 다니는 사람들이라 나랑 안 맞다. 어쩌면 그게 현명한 건지도 모른다.
신랑은 당연히 친구들과 하루 자고 결혼식장으로 바로 갈거라 생각했다.
정장과 필요한 물건들 챙겨 나가려는데 다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랑 잘 자린 없다고! 잠시 왔다가 집에 가서 다음날 결혼식 오란다. 이건 무슨???
우리 집에서 결혼식장까지 한 시간 거리고 숙소는 결혼식장 옆이다.
이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해야 하나? 나 같으면 밤에 안 갔다.
저 벨도 없는 사람은 짐을 다시 꺼내고 결국 친구들 만나러 차를 가지고 갔다.
도착했다고 연락 왔다. 친구들이 술 한잔 하자고 한단다. 술 먹고 운전 어떻게 하라고? 뭔 소리래? 그러면서 잠잘 곳 있다고. 아니 없던 잠자리가 술 먹으면 짠하고 생기는 건가?
난 밤에 신랑 나갈 때 혹시 모르니 결혼식 입을 옷도 챙겨가라고 했다. 상황이란 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알았다고 챙겨갔다.
그런데 한다는 소리가 신발을 운동화 신고 왔단다. 정장은 검정인데 그것도 흰 운동화란다. 나참...
"잠잘 곳 없다며? 없던 자리가 갑자기 생겼데? 그러면 미리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가? 말했으면 신발도 제대로 챙겨갔잖아. 내가 분명 혹시 모르니 챙겨가라고 했잖아."
순간 짜증이 났다. 하나같이 나이가 오십이 다되어간다면서 하는 건 왜 저렀는지.
"그럼 어떻게 할까? 지금 갈까?"
신랑도 말투가 거칠어졌다.
한참 티격태격했다. 지금 오라고 하면 기분 좋게 올 건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 보고 싶어서 설레는 맘도 아는데 화가 난다.
"잘 곳은 있다며? 그냥 낼 흰 운동화 신고 결혼식 하고 오너라."
"새벽이나 이침 일찍 집에 갔다가 다시 올라고."
와. 이걸 말이라고? 누구 혈압 올리는 건가? 친구라는 애들도 신랑이라는 사람도 다 꼴보고 싫었다.
알아서 하라고 끊었다.
새벽 2시에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자는척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에 눈뜨니 신랑이 씻고 준비하고 있었다.
"몇 시에 왔는데?"
"새벽 2시쯤?"
"술 먹고 그 시간에 어떻게 왔는데?"
"대리 불렀지."
난 더 이상 말 안 했다. 대리비로 차라리 신발 하나 대충 사겠다. 가슴이 답답하다.
자기건 제대로 못 챙기면서 다른 사람 일이라면 온몸으로 하니.
가끔 그런 생각 든다. 내가 미쳤다고.
결혼한 걸 후회한 적도 있다. 지금도 가끔 후회 중이고.
결혼식은 신랑 혼자 갔다 왔다. 신랑이 옷 갈아입고 식탁에 앉더니 말했다.
"와, 신부 학벌이 대단하던데. 아버진 교수고 신부도 외국 갔다 오고 제주도에도 집이 있고."
그렇겠지. 5급 공무원과 결혼하는데 상대도 어느 정도 되겠지.
비슷한 사람들이 만난다는 말이 어쩌면 맞는지 모른다.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난 내 어릴 때 생각이 났다.
내가 교욱에 관심 있는 집에 태어났더라면?
그때 너무 몰랐던 나 자신도 한심했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내가. 우물도 엄청 작은 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회사 다니면서 혼자 공부해서 수능 다시 치고, 그렇게 가고파 했던 수학과를 등록금 한 번만 지원해 줬어도 지금 내 상황을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자면 영화보더 더 영화 같은 삶이었다.
아름다운 영화는 전혀 아니다.
전생에 악연이 만나서 부모자식이 된다는 말이 있던데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전생에 나라를 몇 개 팔았나?
난 여덟 살 때부터 집 일을 시작했다.
전자 부품을 기계로 찍어내고 조립하고.
큰 기계일은 아니었지만 그 작은 손으로 동네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한 나의 어린 시절.
쉬는 날이나 방학이 되면 눈 뜨면 일부터 시작했던 나의 가여운 어린 시절.
그렇게 일을 해야만 돈을 받았었다.
학원? 꿈도 못 꾼다.
돈 없다 돈 아깝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엄마라는 사람의 지긋지긋한 돈 없다는 소리에 내가 일해서 받은 돈으로 책사고 다했다. 더럽고 치사하게 사달란 소리 안 했고, 학원도 보내달라 안 했다.
학원? 한 달 다니고 그만뒀다. 학원비 없다면서 징징 거리던 목소리가 지겨웠다. 학원비 마지막날이 되어야만 겨우 받을 수 있었다.
그땐 국민학교였지. 학교에 납부하는 돈이 있었는데 그 돈도 독촉을 해야 겨우 줬다. 육성회비였던가?
돈 낼 때마다 제일 늦게 내고, 어린 맘에 부끄러웠다.
나의 가여운 시절.
그렇게 서른까지 집에 일에 벗어나지 못했고, 다른 곳에 일하러 가면 그것도 돈이라고 벌어오냐며 집에 일이나 하라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난 왜 그때 벗어나지 못했을까? 욕이란 욕은 안 들어본 욕이 없을 정도로 입에 욕을 달고 살았던 사람들. 그 속에 난 죽으려고 손목을 그은 적도 있었다. 실패했다. 막상 손목을 찌르려니 깊이 찌를 수가 없었다. 분명 살고 싶진 않은데 쿡 하고 깊이 못 찔렀다.
자살하는 사람들 보면 맘이 아프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얼마나 힘들면 저런 선택을 했을까 싶고, 막상 세상과 작별하는 그 순간 큰 용기가 필요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난 그 용기가 부족해서 실패했다.
누군가는 그러지.
죽을 용기로 살라고.
그런 사람들 죽고 싶다 생각은 해봤을까?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 겪어봤을까? 쉽게 말하지 마라. 겪어보지 않았으면.
이런저런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나의 어린 시절이 하염없이 가여웠다.
그러면서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원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집 말고 다른 곳에서 돈을 벌면 다 가졌갔던 엄마라는 사람.
지금은 그런 적 없단다. 나한테 단 한 번도 돈 십원 받은 적이 없단다. 나만 보면 욕을 한다. 입에 담기도 싫은 욕을.
등록금 딱 한 번만 해달라고 그렇게 애원했건만.
결국 수학과 합격하고도 포기했다. 평생 용서가 안된다. 어쩌면 죽을 때도 난 용서 못한 거 같다.
살면서 다시 하라고들 하지. 말은 쉽게들 하지. 누가 애들 봐주는데? 생할비는?
나이 들어 살면서 다시 공부하는 건 주위에 지원해 주거나 믿을 구석이 있어야 할 수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은 일반적인 삶이 아니다.
지금도 정말 다시 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현실로 돌아온 난 많은 일을 겪으면서 조금 늦었지만 인생을 배워간다.
신랑 친구도 지금 그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
남들 놀 때 다 놀지 않았겠지. 하기 싫고 힘든 일도 외면하지 않았을 거고.
나도 처음엔 결과만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듣고 자랐으니까. 누구 하나 과정의 중요성과 방법을 알려준 적 없었을까.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몰랐고.
이제 반백살이 되어가니 조금 알듯하다.
그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노력이란 걸 했을지.
그 친구와 그 친구가 배우자가 부럽기도 했다. 거기까지다. 어디까지나 그 사람들 삶이니까.
난 내 삶을 살아야 하니까.
내게 한 번이라도 인생에 대해 얘기해 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우리 결혼식 할 때의 일들이 영화필름처럼 좌르르 펼쳐지나 갔다.
결혼준비도 둘이서만 했고
다들 주고받는 결혼반지조차 없었다.
사실 연애하면서 세상천지 신랑이 혼자인 줄 알았다. 신랑 어릴 때 키우주신 고모만 있는 줄 알았다.
준비하면서 친척들이 있는 걸 알았고 준비과정에서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도 안 해준 사람들이 자기들한테 인사하러 언제 오냐고 그런다.
우린 부산이고 자기들은 서울인데.
뭐 좋은 게 좋다고 인사하러 갔었다. 내 돈으로 방문할 때 두 손 가득 사가도 대우는 못 받고.
그때 느꼈다.
아! 신랑도 세상에 혼자인 거나 마친가 지네. 돈 있을 땐 친척들이 좋아라 하고 지금처럼 없을 땐 남보다 더하네.
결혼식 하는 날까지 그랬다.
폐백은 자기들이 신랑 측이 가져가는 거라나?
준비는 다 우리 쪽이 다했는데?
결혼준비하는데 애쓴다는 말 한마디도 안 해준 사람들.
더 웃긴 건 손녀 돌잔치한다고 연락이 왔다. 어쩌라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자기 손녀 돌잔치 오라고?
돈 보내라고?
우리 신혼여행에서 오는 날 제주도 공항에서 전화 왔다.
자기들 환갑이라고. 어이없다.
또 서울 갔네. 우리 잠잘 곳은 그 누구 한 명 신경 안 써줬다.
노래방 가는데 노래방비 팔십만 원도 우리가 냈네?
내 부모 환갑도 아닌데!
그리고 요즘 누가 환갑이라고 연락해. 가족끼리 조용히 밥 먹음 되지. 환갑은 명함도 못 내미는 시대 아닌가? 실컷 먹고 다하니 우리야 가든지 말든지 기차표도 놓쳤는데 걱정이라곤 그 누구 하나 안 해주더라.
지금은 연락도 안 한다. 자기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온다.
우리 애들 태어났을 때 내복 한 벌 안 보내준 사람들.
받을 줄만 아는 사람들.
대체 이 남자는 어떻게 살아온 건지...
자기건 못 챙기면서 있는 허세란 허세는 다버렸네.
옌예기간이 긴 건 아무 소용없는 거 같다.
살다 보니 보이더라.
너무 모르고 살았던 내 반백살 인생이 이제 제대로 살아보라고 채찍질하는 거 같다.
지금 상황이 많이 힘들다. 삶의 무게가 이런 건가 하고 느끼고 있으니.
보통 내 나이쯤 되면 삶이 조금씩 안정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한 달 한 달 살아내는 게 힘들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인생을 삶을 멀리 바라볼 줄 몰랐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 같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으니까.
요즘 내 나이또래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사는 거 보면 여유 있어 보이고 삶이 아름다워 보인다.
물론, 내 삶과 비교가 되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난 왜 이럴까. 나만 왜. 왜왜왜 하면서 세상을 원망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는데...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모른 채.
지금은 조금은 변했다.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지.
아직 답을 찾진 못했다. 하루하루가 사실 숨이 막힐 정도로 힘들다.
두 아이를 보면 맘이 아리고, 이 삶을 아이들에게 넘겨주긴 더더욱 싫다.
이겨내야지. 방법을 찾아야지.
친구 결혼식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저 사람이라면 하는 상상도 잠깐 했었다.
지금부터 인생을 그려보는 것도 늦지 않았겠지?
더 늦기 전에.
이젠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올라갈 일만 남았다.
수많은 계단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다.
한 칸씩 걸어가 보려 한다.
가다 보면 정상도 보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