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일주일 동안 숨겨왔던,
내게 벌어진 잔인한 현실을
울분과 함께 토해내고 있던 와중이었다.
아버지가 말을 끊었다.
“자네. 편하게 앉아.”
아버지의 태도에 큰 충격을 받은 나는
다음 말을 잊은 채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시선은
눈물을 무릎 위로 뚝뚝 흘리고 있는
그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다시 한번 말하자
그제야 그 사람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버지의 시선이
그제야 나에게 옮겨졌다.
“그래서.”
그 한마디였다.
나는 그 이후의 말들을
터지듯 쏟아냈다.
내 말이 끝났다는 걸 확인한 아버지는
짧게 말했다.
“그만 울어.”
그리고 다시
시선을 그 사람에게 옮겼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아버지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나를 더 큰 충격에 빠뜨렸다.
평소보다 더 차분하고
너무도 일상적인 말이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할 계획인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화가 났다.
아버지만큼은
그 사람에게 욕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내 딸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뭐라도 집어던지거나
한 대쯤 때려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계획이 있을 리 없었다.
이미 터진 일이었으니까.
그저 목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일이 벌어지고 나서
밝히기 전까지 기간이 있었다며.”
아버지는
눈물을 참아낸 붉어진 눈과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계획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그리고 덧붙였다.
“빚이며
얘 암보험금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버지는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다.
대신
이미 벌어진 현실에서
해결해야 할 것들을 묻고 있었다.
나는 죄인인 것처럼
더 이상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 뒤에 걸린
엄마의 영정사진만 바라보고 있었다.
현실을 처음 알게 된 날,
그 집에서는 소리가 컸다.
욕이 있었고
고성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현실을 물었다.
그리고
오빠는
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내게 말했다.
“병원 예약해 놨어. 가자.”
공증을 쓰러 가는 날에도
오빠는 말없이 같이 갔다.
그 사람 쪽은 달랐다.
그 사람의 누나는
처음에는 말했다.
“미안하다.
어떻게 해서든 니 암보험금은 돌려줄게.”
하지만
공증 이야기가 나오자
태도가 바뀌었다.
“절대 쓰지 마.”
나는 말했다.
“오지 마세요.”
그래도 왔다.
나는 말했다.
“오면 경찰 부를게요.”
그러자
그 사람 누나는 소리를 질렀다.
“불러.
경찰 불러.”
그리고 욕을 덧붙인
고성을 질러냈다.
그래서
나는
경찰을 불렀다.
그날 하루는
무척이나 길었다.
누군가는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 뒤에 걸린
엄마의 사진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현실에 도달한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는 현실을 물었고
오빠는 말없이 나를 살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날은 내 인생에 가장 긴 하루였다.
연재글로 묶이지 않아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