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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reciate: 감사는 가치를 의식하는 것

appreciate의 어원과 의미 발전으로 이해하는 '감사'

by 잉덕

1. 두 번의 만남

지금의 나는 영어에 많이 익숙해져 이렇게 덕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영어가 서툴렀던 중학생 시절의 나는 번역기를 써 가며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곤 했다.


한 마디하고 번역기 돌리고, 다시 번역기 돌리고, 친구의 말에서 한 한 마디 배우기를 반복하던 식이었다.


그래도 내가 아는 것, 내 언어를 나누며 '고마워를 듣기를 즐기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 I appreciate it!"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에겐 새롭고, 복잡하고, 엄청 어려워 보이는 단어였다. 그러면서 의미는 그냥 '고맙다'라는 뜻이라니! 왜 'Thank you'를 제쳐놓고 그런 말을 쓰는 거지? 그것도 일상에서? 멋져 보이고 싶은 건가?


그게 내가 기억하는 처음으로 'appreciate'를 만났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성인이 되어서까지 쭉 펜팔을 해오다가 그 연장선으로 한국어 수업 봉사를 했다. 그중에서도 한국어로 취미를 말하는 단원이었다. 교과서에는 한국어로 된 취미가 다양하게 실려 있었다. 축구, 수영, 독서, 음악 감상...


그리고 내가 물었다. "음악 감상이라는 단어 아세요? 무슨 뜻일까요?"

그러니 학생이 답해주었다. "네, 'music appreciation'이요."


그 순간 마치 옛 친구를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만난 것처럼 반갑고 놀라웠다.

수업을 하던 중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몰래 감탄했다.

'잠깐, 'appreciation'? 여기선 '감사'가 아니라 '감상'이네?'


'감상'과 '감사'가 하나의 단어라니! 나는 또 궁금해지고 말 수밖에 없었다.

왜 'appreciate'는 감사와 감상이라는 뜻이 함께 있는 걸까?



2. 감상 감사의 시작, 가치 알기

'appreciate'의 시작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appretio'가 그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appretio (라틴어): 가치를 매기다


여기에서 수동 완료 분사가 'appretiatus'로, '가치를 높게 매기다 / (대단히) 존경[찬탄]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게 appreciate의 어원이다.


그런데 잠깐, 여기에서 의문점이 생기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미 결론이 나온 것을 보다 보니 자연스러워 보일 뿐이다. 다시 한번 짚고 생각해 보자. 단어는 초기에는 '가치를 매기다' 였다가, 이후 '가치를 높게 매기다'라는 뜻이 생겼다.


왜 '가치를 매기다'라는 게 '가치가 높다'는 쪽으로 연결되었을까?


가치를 매긴다, 평가한다고 하는 것이 꼭 그 대상이 높은 가치를 가졌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치를 매겨봤더니 별 대단하지 않은 거더라'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 단어의 의미는 '가치가 높다'는 쪽으로 연결되었을까.


이 이유에 대해서 직접적인 이유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언어의 유표성을 소개할 겸, 내가 생각했던 흐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유 1. 언어의 유표성: 언어는 대개 긍정적인 것이 default 다

가치, 가치... 내가 이 글에서 가치라는 말을 참 많이 하고 있는데, '가치'라고 하는 건 무엇일까?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한자어로 '가치'는 價(값 가) 자에 値(값 치) 자이다.

두 개의 글자 모두 '가격'의 의미를 가진다.


또, 영어 'value'의 네이버 영영사전의 풀이도 보면

'the regard that something is held to deserve; the importance, worth, or usefulness of something',

어떤 것이 가지는 유용성이나 값어치, 중요성에 걸맞게 가지는 평가라는 의미가 있다.


가치는 다양하다. 미적 가치, 실용적 가치, 희소성, 금전적 가치... 무엇이 더 중요하느냐는 각자 다르게 느끼겠지만, 보통 아래의 질문을 거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얼마나 귀하고 특별한 것이지?'
'얼마나 유용하고 오래 쓸 수 있지? 또, 어떤 훌륭한 기술이 쓰였지?'
'보기에 얼마나 아름답지?'


그런데 이때, 사용한 표현을 잘 의식해 보면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귀하다, 특별하다, 유용하다, 아름답다... 이들은 모두 긍정적인 말이다.


언어는 긍정적인 표현이 대체로 기본적이고, 일반적으로 느껴진다.


위의 질문을 부정적인 말로 바꿔보면 이렇다.


'이건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것이지?'
'얼마나 쓸모없고 빨리 고장 나지? 또, 어떤 싸구려 기술이 쓰였지?'
'보기에 얼마나 못생겼지?'


쓰다 보니 나도 실소가 나올 정도로, 참 부정적인 태도로 삶을 사는 사람의 생각 같기도 하다.

말하자면, 참 특이한 생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이렇게 언어가 부정적 표현보다는 긍정적인 표현을 기본적으로 쓸 때 '유표성이 낮다'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영어에서도 마찬가지로, How big, How long이라 하지 How small, How short라고는 잘 하지 않는다.


이처럼 대부분의 언어는 유표성이 낮은 긍정적 표현을 기본으로써 사용한다.


그렇다면 appreciate의 변천사에서 '가치를 매기다'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가치, 가격이라는 것은 수치와 정도에 대한 이야기인데, 가치를 매길 때 '가치가 얼마나 높은가'로 판단했을 테니, 이게 그 단어에 고착이 된 게 아닐까.


여기에 또 한 가지 이유, '높이 평가' 하는 것이 단어의 기본적 뜻이 된 이유엔 'appreciate'가 가진 핵심적이고 공통적인 행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유 2. appreciate에 담긴 핵심적 행위


다시 현재의 단어, 'appreciate'의 의미를 보자.

네이버 영어사전

이 세 가지 의미가 가진 공통적 행위는 무엇일까.


세 번째 의미, '(제대로) 인식하다'에서 힌트를 얻고 보면 명확해진다.


바로 appreciate 에는 가볍게 넘기는 것이 아닌, 자세히 살펴보고 의식하는 행위가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치 1. 진가를 알다

진가를 알아보려면 내가 그것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얼마나 귀한지, 왜 귀한지, 무엇이 훌륭한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짧은 시간에 대충 흘겨보는 것과는 상대적인 행위다.


가치 2. 감사하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하찮게 여기고 대충 넘긴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에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감사는 무엇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아봤기에 하는 행위인 것이다.



3. 마무리하며

많이들 행복의 비결로 감사 노트를 쓰길 권한다. 하지만 나는 무엇에 대해 감사하다고 써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책에서 본 대로 날씨에 대한 감사를 써봤다. 그런데 '감사하다'라고 글로 쓰면서도 별로 감사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일상에서 그저 겉치레로, 반사적으로 너무나 많이 말했던 탓일까.


그래서 난 감사의 의미가 궁금했다. 무엇에 감사해야 하는지, 어떨 때 감사를 '느낄' 수 있는지.


appreciate 가 가진 의미는 내가 궁금했던 의미에 가까웠다.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나 진가를 아는 것이나, 감사와 결이 비슷하지 않은가.

그래서 처음에는 없던 '감사'라는 뜻에도 이 말이 쓰였던 게 아니었을까.


하루하루 날씨가 어떻게 좋았는지, 햇빛은 얼마나 예쁘게 비쳤는지. 얼마나 예쁜 꽃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얼마나 친절한 사람을 만났는지, 그 친절에 어떤 배려심과 노고가 있었을지. 얼마나 긴 시간과 생각을 거기에 쏟았을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제대로 인식하고,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의식할 때 우러나오는 감정이 고마운 마음, 감사가 아닐까.


그게 내가 'appreciate'를 보며 받은 깨달음이었다.




appreciate의 어원 부분은 etymonline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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