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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Jan 26. 2023

교수님 저는 공예가 될래요!

생략, 생략. 그러고 나니 쓸게 없었다.

11월 3일

보기에 괴로운 이들이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외적으로 추한 모습을 하고 있나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름답기 때문에 보기 괴로워지기도 했다.


그것은 혐오라고 불러야 할까 경외심이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곰곰이 고민해 보다 숱한 이들의 결정처럼 그들을 외면하고 함께 있는 시간을 모면하려는 무던함을 보였다.


11월 5일

사람은 낮에 돌아다녀야 한다.


아침의 논현역을 지나며 새삼 서울에 포르쉐가 이렇게 많구나 했다. 전국에 기껏해야  천대쯤 있을 브랜드의 자동차. 내가 외출해 지하철에 있는 시간을   시간 남짓한 도보 이동 시간 동안 적어도   남짓한 그것을 본다.


삶의 목표나 지향성을 묻는 질문에 포르쉐 사기, 하고 대답하는 내 모습이 과도한 황금주의의 극치를 대변한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눈 들어 도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굴러다니는 꿈의 현실성에 고개를 끄덕일까.


11월 9일

앞머리만 잘라도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변화는 저항하는 이에게는 고통일 뿐이라.


내가 만약 그였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주문하겠나, 맞다. 행복이 있으라. 행복이 있으라. 그것은 그러나 개인적인 바램을 잔뜩 넣은 공공의 창조였다.


11월 12일

바바루사는 엄니가 계속 자라서 결국 자기 엄니에 두개골이 뚫려 죽는대. 그래서 인간이 죽지 않도록 엄니를 잘라준대. 세상도 같이 진화했다. 이걸 일컫는 말이 있을 줄 알았지. 공진화. 먹이가 진화하니 포식자도 진화하고 피식자는 그에 맞춰서 재차 진화하는 이 현상을 누군가도 목격했을 줄 알았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이 무력하게 한다. 내가 간접적으로 접한 지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24시간 내내 안하무인의 태도를 유지하며 삶을 밀어붙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세상은 가위바위보라고 이해하고 언제나 이기는 사람도 언제나 지는 사람도 없다며 패배감을 지우기 위한 위로인지 가능성을 확신한 격려인지 모를 말을 되뇌었다.


첫 번째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삶은 끝나는 게 아니다. 1-0 달성하면 1-1 해금. 죽는 것이 해금되는 그날까지 파이팅


11월 23일

떠올리면 추위가 주연을 맡는 기억들. 나는 회백색으로 공구리 된 담벼락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는 너를 기다리곤 했었다.


지루함은 잊힌다. 아마 당시의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리. 경시해야 할 감정들이 잦다.

지루하다는 느낌이나 충동적인 열망들은 시간이나 순간을 모면하면 정말 한 톨의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종적을 감춘 계절특수들.


얇은 패딩을 입을지 두터운 패딩을 입을지 고민을 하다 보니 기대를 가득 품은 채로 코트를 입던 과거의 내가 딸려 나와하는 이야기. 입장의 온도차가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날씨는 코트로도 충분히 따뜻하고 버틸 수 있는 정도였지만 드러난 살갗에 말과 눈이 찰과상을 만들었다.


늘 마음가짐과 태도의 중함을 염두해도 난 단위나 도량이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인지, 인정받는 일은 적고 에너지 낭비라 생각되는 날이 늘어 나는 혼란스럽다. 담벼락에 앉아있는 나를 너는 기억조차 못하겠다 싶어 그랬다.


눈 가진 이는 죽고 악기의 줄은 끊어져버렸다.


11월 27일

내 진심은 언제나 죄악이 된다. 누군가의 진심은 꽤 몽글몽글하고 아름다운데 나의 본심은 어디 운동장에서 얼마동안 구르다 왔는지 모르는 누더기 축구공의 모양과 비슷하다. 귀신 축구공. 어떤 날은 있다가 어느 날은 없었다.


양가적인 이 마음을 처음 이름 붙인 이. 시작과 끝은 이어져있다는 개념을 감정에도 가져다 붙인 이. 누구였을까 이 극렬한 인력과 함께 벌어지는 격렬한 척력을 함께 가진 이.


정신은 아주 작은 모래알로 이루어져 있어 모아도 모아도 손에 묻어 흩어지고 작은 바람에도 구심점을 잃고 부서져 버린다. 모아보려는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 바람이 분다. 눈으로 바라보는 저 끝에서도 불어오고 목덜미가 시린 방향에서도.


11월 29일

그림자도 밟지 말라. 그것은 존경심의 표시였다. 내가 그림자를 밟기도 꺼려지던 이가 있었나 생각해 보면, 그때 그때.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충실하게 살아왔다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왕왕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나는 도무지 그림자의 침범을 결례라고 생각할 만큼의 위인을 찾을 수 없었다.


12월 6일

열차의 벽면이나 몰드, 복도 천장 어디를 살펴봐도 당장 이 순간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단서가 없다.


지상을 달리고 있지도 않았거니와 설령 달리고 있다고 해도 바깥은 빛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인내와 지루함에 대한 내성의 결여로 이 무지한 시기를 버티기 어려웠으나 빚진 게 많아 내릴 수 없었다.


가을 익은 은행처럼 우르르 떨어지는 말들이 언제나 쏟아둔 후에 위험해 보였기에 뇌를 빼고 대화를 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드는 생각은 그마저도 과하다였다.

항상 대화를 끝내고 나면 그랬다. 말들은 내가 들이켰다 뱉어버린 숨들 마냥 그냥 대기로 훨훨 날아가 흩어지지가 않았다. 강해진 검열에 반비례해 떨어지는 친밀도에 울상이 지어졌다.


12월 20일

재력가가 되는 게 꿈,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럴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평이한 누군가의 진리에 반문하며 공룡이라는 우습고 재밌는 대답을 하는 이 이후엔 구매불가는 그리 와닿는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돈다발로 계단과 발판을 만들어 기존에는 닿지 않던 선반의 물건을 꺼내길 바랐던 것이라.


저점을 알아보는 것도 능력이다. 가치판단이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같은 물건을 옆사람보다 비싼 돈을 주고 사는 일이 마냥 유쾌한 사람도 없을 테다. 그러나 웬만한 금액으로는 단가를 맞출 수 없는 것들이 눈에 띄었다. 한참 모자라는 예산에 불발된 거래를 비웃듯 가격이 치솟았다.


잊어진 사람들은 정말 잊어질 따름이었다. 번호를 지우길 잘했고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소식의 폭격에서도 도망쳐 나오길 잘했다. 휘발되어 사라질 새벽의 엄지로 눌러보는 프로필 사진들은 차라리 웃음이나 실소를 자아내는 것이기를 더 원했고, 그렇게 이루어졌다.


열 장 남짓한 사진들을 넘기면서 갖은 생각들을 거닌다. 날이 몹시 좋은 서울숲의 어느 날은 무력한 나에겐 크나큰 기쁨이었었지 싶다. 기쁨이 없다면 나무와 들풀을 찍을 일이 없었으리.


고개를 늘어뜨리며, 우울을 걸으며 보던 사진들은 피식하는 입꼬리를 지닌 채로 최근 삭제된 항목 안으로.


12월 27일

누구나 집을 만든다. 아기돼지 삼 형제만 해도 각각 다른 재료와 모양으로 다른 결말을 맞이하는 집을 지었다. 위기는 모두에게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형태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 허락된 재료만으로 유약한 집을 짓고선 평생을 안전하길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지 싶다.


하루가 다르게 얼어붙는 11월과 고조되는 12월을 지내며 지루한 장소의 다양한 군상에서 재미를 찾아보려 노력했다.


나는 21년과 22년을 뭉뚱그려 마음속에 저장했기에 올해의 안건만 가져다 놓고 정돈된 아젠다를 구성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두 해를 관통하는 말로써 꼬리표를 단다면 어떠한 말을 꼽을지 고민했다.


공교롭게도 우린 각자가 추구하는 노력을 서로 무색하게 하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고개를 돌릴 생각을 내려두고 보지 않는다.

질투로 쌓은 첨탑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무관심이 양립하며 누가 더 하늘과 맞닿을 수 있는지 서로를 뽐내며 높이 오른다.


타인의 기쁨을 질투로, 타인의 기쁨을 무관심으로. 질투와 무관심의 시간들이 23년에는 부디 소강을 겪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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