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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Nov 18. 2022

앙버터 먹을 때는 꼭 귀엽게 앙~ 소리를 내세요

이번 생일날엔 글을 안 썼다. 작년 생일엔 지하철에서 울었다

내년에 꽃이 피는 날까지. 내가 정신 놓았던 날이 한 달씩이나 있었다는 걸 상기했으면. 다행인 건 빈한 줄 알았던 10월에 퍽 여유롭고 그만큼 썩 심란했나 보다. 글이 꽤 많네.


10월 1일

이전의 지렛대 강도가 모자랐으니 들지 못했겠지. 나는 새로운 막대를 구하고 점점 목표로부터 멀어지기를 택했다. 상대적으로 적은 힘으로 눌러 들어 올릴 수 있는 지점까지 가기로 했기에 나는 여전히 그와 멀어지는 중에 있다.  


10월 2일

그럼 나는 애인이나 반려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친구, 내 내면을 뒤집어 속내를 샅샅들이 알게 되더라도 전혀 문제없을 그런 대나무 숲 같은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그냥 내가 대창이 되어서 여기저기 세척당하고 반으로 갈려 불판 위, 식탁 위에 올라갈 정도가 됐어야 하는 게 아닐까?

깨끗해졌다고 믿는 내 믿음이랑은 별개로 취식자의 소화력을 믿어보아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의심 없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수 있는 그런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싫지만서도 글에는 매번 의문만 써갈긴다. 이런 거 아닌가, 사실 이랬던 거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 위안이 되나 싶기도 한데 전혀.


하지만 받아들이는 일의 어려움은 고하를 막론하고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모든 음식은 소화가 되겠지만 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 나는 애초에 게워내거나 꾹 눌러 삼켜 반의사가 닿지 않는 곳으로 그들을 보낸다. 그렇다면 내 자의가 닿는 곳을 어디까지로 상정할까나. 적당히 손질된 식자재, 적당한 굽기, 아니면 그것들을 부술 이빨. 나는 변기통에 얼굴을 쳐박고 싶지는 않으니 내 목구멍 톨게이트 전까지가 적당하겠다.


10월 3일

적당한 거리는 해상도라는 말로 정의됐다. 너무 가까이서 바라보면 안 된다는 말로 주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내 삶도 벡터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까이 가까이 더 가까이 가서 탐구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고 깊숙이 빠졌다가도 금방 트랙패드 위의 손가락을 움직여 쑥 빠져나올 수 있는 거 말이다.


10월 4일

부딪히고 싶지 않으면 길을 따라가 장애물은 없는 것처럼. 그저 길만 있는 쉬운 여정처럼.


너 좀 건방져진 거 같다?

화면을 두드리는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런가? 생각해보면 마땅한 역치에 도달한 것도 아닐 텐데 불현듯 나는 나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되려 건방짐을 생산하는 꼴이라니! 아마 어린아이를 버리고 소년을 버린 알 수 없는 기간과 시점이 인식과 동시에 가치를 잃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듯이. 자신감의 겉포장이 랜티큘러 카드처럼 저쪽의 사람에게는 건방짐으로 보임을 은연에라도 깨달은 후부터는 이전의 내가 어땠는지를 알고싶어져 저 굴뚝이나 눈길에 부서진 하얗게 불사른 연탄을 뒤적여 보곤 했다.



10월 5일

권태를 견디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권태로움의 불감이 능력이라면 나는 한없는 무능력자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때때로 멋진 이들이 흘리거나 잠깐씩 들춰보여주는 성공의 편린들에서 한 없는 권태와 지루함을 본다. 내가 500마리 말이 끄는 그들의 차를 부러워하고 핸들을 잡은 손의 아래 걸린 시간을 보며 닮으려고 했으니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데 이번에는 얼마만큼의 질투와 동경을 담아 보내야 권태를 버틸만한 필터를 얻을 수 있나 고민해본다. 그 사람들은 커피도 콜드브루만 먹고 진짜 오래 고아낸 국밥만 먹고 웨이팅 긴 매장도 아랑곳 않나 싶다.


10월 6일

말에도 환율이 있다. 혹자는 그걸 말의 무게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환율이라고 표현할 셈이다. 두 그룹의 편차가 심하면 발생하는 문제들에는 마음으로 하는 힘싸움이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안다.


물가가 오르는 것은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거라던데 그도 그런 게 내가 열심히 가치를 캐고 때때로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견한 발전들이 간헐적으로라도 지속되었을 때 나는 사람들이 내미는 조언이나 충고들을 비웃거나 무시하게 되었다. 과거에 싸구려 싼마이 위로라고 여기던 것들의 수위가 훨씬 더 올라서 이제는 진심까지 매도하게 된 것이다.


말하지 않고도 이기는, 싸우지 않고도 이겨버리는 대인을 꿈꾸면서도 말에 가치를, 사람에 가치를 매겨서 소통하려는 모습이 너무 기괴해서 나도 이해가 안 된다.


완결되지 못한 마음은 뭐랑 같냐면, 종이 화폐로 가지고 있는데 이미 고점에 사서 이런 저점에서는 아까워서 바꾸지도 못하는. 본래 역할을 역행하는 그런 것이다. 눈에서 빼보면 속눈썹. 퉤퉤, 뱉어내면 겨우 나오는 입 속의 머리카락.


10월 7일


#1

이 노래 속 화자는 며칠짜리 사랑을 가지고 조리해 내놓은 걸까? 저렴해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정도 가격 선에서 얻은 재료인지 궁금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10년 미만이다. 왜냐면 내가 글다운 글을 종이에 펜으로 끄적이던 유리 액정을 톡 두드려 적었던 그 이상은 안되니까. 근데 이렇게 말하면 며칠짜리라 물어본 의미가 없지. 아마도 1년 아래 아닐까? 항상 내가 징징대는 지속 가능한 호감과 사랑의 객체가 그 이상의 시간을 강탈하려면 진짜 지대한 관심이 있지 않은한 어려울 거 같으니까. 지속하고 있는거래봤자 글쓰기, 물레, 운동 그리고 숨쉬기. 이런 거 보면 부모님은 자식 어떻게 키우나 싶어.


진짜 궁금증은 미간을 찡하게 하는 이 가사와 가수가 얼마짜리 사랑을 생각하고 쓰고 부른 거냐 이 말이다. 요새 유행인 유사연애, 연애매칭 프로그램마냥 사흘, 일주일 이런 거 아냐? 그런 거면 감동이 단두대에 올라갈 위기다.


몇 안 되는 내 글에 공감을 보내는 친구들. 그분들도 마찬가지일까 대뜸 민망해진다. 내가 뇌를 빼고 끌려다니던 을의 연애와 제법 이기적이었던 쌍놈의 시간들이 대충 미화되어서 감성으로 적힌 적이 얼핏 많은 것 같아서.  


#2

밤을 졸이다 보면 까맣게 바닥이 눌어붙은 새벽이 된다.

태운 냄비만 고물상에 갖다 팔아도 주방 기구를 다 바꾸고 남을 정도는 받을 수 있겠다.


유의미한 일은 유의미한 날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흐름을 깨고 싶지는 않았지만 받아야 하는 전화가 있듯이 우선순위는 즐거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당시에 처한 상황이 걸려오는 전화보다 재밌다고 말할 수 없었고 네가 선택한 삶이 크게 더 도움이 되거나 위대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이해도가 높아지는 가을이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나는 그렇고. 늘상 있는 일들이 지혜를 줄 수 있기를 바라 왔는데 바람대로 됐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필시 내가 밤조림을 받았던 받지 않았던 그곳에는 배움이 있었을 테니까. 안 받기를 잘했다. 애꿎은 음식에 관념만 채워 넣을 뻔했으니. 아예 속이 텅 빈 음식은 아니었어서 빈 곳을 내 멋대로 채워서 삼킨 다음 담아왔던 통을 빌미로 한 번 더 파도 위에 떠다니고 싶었다.


지도는 생각보다 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올바른 길을 알지는 못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10월 17일


#1

내 안에서의 싸움이 끝나고 나면 바깥과의 마찰에 대해서 생각했다.


삶은 실전이며 낙장불입이란 말은 실재적 두려움에 딸린 수식어이자 이름이다.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했으나 그 기간 동안 내가 배제했던 선택지들은 무심히 떨어진 낙엽만도 못하게 거름이나 영양분도 못된 채 쓸려 사라졌다.


잘 못할 거 같아서 내가 포기했던 것들에게는 어떤 위로를 보내야 될까 그들에게 새로운 삶이 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상황을 알리고 감사를 받아야 할까도 고민했지만 고마움을 받들 이는 그쪽이 아니라 오히려 내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10월은 이상한 달. 태어나버려서 그렇다.


다르디 달라서 섬찟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싶어서. 나는 그래서 낯선 이에게 말을 놓는 게 어려워 미치겠다. 눈을 보고 입을 떼면 가감 없이 ~요가 붙어버리는 입술 사이로 편안한 말이 나오기가 힘들어진다. 고비를 넘었다고 생각해 집에 와 잘 들어갔냐는 문자를 보낼 쯤에는 ~요는 손가락에 다시 붙어있다.


목 아래로만 사랑을 읊던 시기를 의외로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뼈를 부러뜨리고 그 끝에 피를 찍어 쓰던 글씨들이 이젠 선홍빛을 잃고 짙은 탁함을 간직하기 되어버리고 나서야 좋았던 문장을 찾아 밑줄을 쳐본다.


내가 닮고 싶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흰 벽지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붙여두고 초록색 식물을 키우기도 하고 노래 취향은 대부분 조용하고 축 쳐진 이야기를 하는 것들. 무엇보다 향기를 모았다. 나도 향기 나는 사람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며 부단히 상고해본다. 나는 아침에 뿌리고 나간 향수가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감쌌는지도 지인 여럿이 나에게 말해주기 전까지 몰랐으니까.


#3

나는 내 것이 생기면 행복할 줄로만 알았다. 내 그림, 내 작업. 내 삶. 그래서 반대로 행복하지 않다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다. 내 자리가 아니다. 내 위치가 아니다. 내 쉴 곳이 못된다, 같은 말들을 스스로와 주고받았다.


때때로 쥐었다 놓은 것, 놓쳐버린 것에 대해서 쓰고 생각했지만 아직 얻지 못한 것에 대한 갈구가 금세 그 자리를 채웠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뭘까. 칫솔 같은걸 원했을지도 모른다. 칫솔은 쓰기 시작하면 나만 쓰니까. 내가 기능이 떨어지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버리는 루틴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칫솔은 빌려주지도, 딱히 그 장소를 벗어나지도 않고 세면대 옆에 얌전히 꽂혀있으니.


물리적 분리가 가장 효과적인 분리의 시작임은 저명하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통하는 말이었더라면 사람들의 숱한 외로움이 조금은 반감되지 않았을까? 그도 그런 게 사실 나는 사랑 말고 사랑하는 내 모습이 좋았던 거라는 심증이 결국 물증을 찾아 확신의 영역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기에.


눈을 지그시 감고 내가 평일에, 낮에, 새벽에 느꼈지만 길가의 들꽃처럼 발에 차여 꺾인 생각들을 찾는다. 글은 메모장에 적히기도 하고 꼭 생각해내야지 하며 마음 어디에 쌓아놓기도 했지만 여전히 우울한 새벽의 줄글을 이길 방도는 없다. 꼭 내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던, 마음이 핸들을 꺾은 날의 오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다시 내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꿈꿔왔던, 이라는 말을 쓴 적이 있는가? 아니요. 그렇다면 내가 꿈꿔왔던 것은 뭘까? 내가 사람들에게 치장하려 이야기했던 내 목표나 당당함의 원천은 꿈과 비슷한 이름으로 불렸어야 마땅할 텐데 말이다.


10월 19일

어느 날 밤에는 너무 적적해 모로 누워 혼자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새 옷을 사고, 종일 티빌 켜놔도.


괜히 함께하고 온 식사가, 나눈 대화가 무색하고도 무색하게 느껴졌다. 이면지와 같은 시간들이 괴롭다. 언제 채우나 싶은 한쪽 면이 도리어 빼곡함을 담은 뒷면을 보게 했다.

슬픔은 내가 일전에 꾹 눌러쓴 글씨처럼 바닥을 향해있기에 가려져있다가도 문득, 흠칫하는 순간에 손을 종이 귀퉁이로 향하게 한다. 뒤집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전에 쓴 글을 다시 읽어 과거를 답습하려는 마음보다 읽고 싶지 않아 하는 쪽의 지지자가 많듯이.


뭘 입어야 되는지 애매한 날씨의 계절에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이야기 속 저 주연 자리에 어떤 성격을 캐스팅해서 앉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먼저 죽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운이 좋아 잠시나마 하고 싶은, 이라 이름 붙인 일들을 하는 일상을 가졌으나 나보다 운이 나빠 일상에 전혀 하고 싶은 일이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가져와본다. 한없이 땅속에 묻히고 싶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차마 그러겠다는 다짐까지는 닿기 어렵다.


10월 24일


분리됨이 두려워 새로움을 경계했다. 아득하고 막막해지는 그 감정을 다시 겪으리라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냥 일순간의 불똥이 아니라 집채만한 불길이 나를 덮친다. 내가 서있는 땅도, 살고 있는 집도 모두 태우고 내가 서 있던 자리에도 내 어깨 간격만한 발자국만 까맣게 그을려 남는다.


10월 29일

이번 생일에는 쓴 글이 급히 만든 브런치북 소개글뿐이다.


... ... 무기력하고 자주 우울한 사람들은 마치 과민성 대장을 가진 사람들이 화장실을 자주 들락날락 거리며 누구도 알아주거나 알리고 싶지 않은 애로사항들을 안고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게 남들과 처연하게 어울리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내가 화장실에서 보낸 인고의 시간과 공터에 가서 뀐 방귀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때때로는 몰라주기를 바라듯 저와 같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뭉뚱그려 가지고 있을 마음들을 도식화해서 쟁여둔 말들입니다... ...


이번 생일의 날씨는 작년보다 따뜻했다. 아무 의미 없는 그저 사실을 적어봤다. 나름 양지라고 생각되던 용산의 거리를 쏘다니다 보니 역시 사람이 모여서 살게 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복기하게 됐다. 온전한 사실과 완전한 진심은 아니겠지만 많은 정신질환들이 따뜻한 세 끼랑 적당한 운동, 규칙적인 수면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나 이렇게 등을 조금 덥히는 햇살이랑 그늘을 지날 때의 서늘함이 함께하는 나날의 산책은 앞선 생각에 무게를 더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지내는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개중에서도 압도적인 사람은 나의 마음속에 투영이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했다. 여전히 가치판단에 있어 혼동을 겪는 나일지라도 역시 그 어떠한 것도 압도적이라면 공포를 넘은 동경이 생김은 틀림없다. 부정하던 긍정하던 상관없다. 자녀는 부모의 발성을 따라 하고, 나 역시 아버지와 목소리가 비슷하다. 창조의 이전엔 모방이. 모방의 이전엔 동경이 있고 동경의 이전엔 두려움이 있다.


나는 곧, 혹은 조만간. 다시 두려워할 대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두려움이 자라서 바람직한 방향성을 띄고 동경이 될 때까지 또 잘 보살펴줘야지.



10월 31일

들여다보던 심연의 깊이에는 미치지 못해도 그것의 색이나 질감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앞에서 졸지에 뚝딱거리는 다듬이나 다름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유머도 재미도 센스도 뭐도 하나도 없는 그냥 목각인형이 된 그 기분은 나의 자존감을 웬만한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제 발로 기분 좋게 탄 비행기가 여정 절반은 제대로 날다가 추락하는 수준의 파괴력이 있었다.

더 이상 요행으로 할 수 없는 시기가 오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 막연히 있었는데 매번 삶은 아슬하게 걸쳐있었기에 더더욱 어색함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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