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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Oct 14. 2022

그 거품 낀 가치가 마치 휘핑 잔뜩 올린 프라푸치노

9월에 벌써 캐롤을 듣는 사람이 있더라

그래도 군고구마는 구워진다. 내가 1년을, 반년을 어떻게 지냈든 간에 편의점 돌멩이 위에는 고구마가 있었다. 아직 더운데 벌써 들어온 모양이다.


작년 겨울의 어느 날에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고 입김이 나오는 날씨지만 잠시 외투를 들고 헬스장에서 걸어 돌아오던 길에 처음 편의점에서 파는 고구마를 샀었다. 군고구마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니 마땅한 글감이 없었지만 비루하더라도 오늘은 9월에 끝자락의 발견을 기록해야 했다. 비루하지만.


겨울 초등학교 앞에는 드럼통에 파는 고구마가 있었다. 여름에는 쿨피스를 얼려 파는 아저씨가 있었고 늘 있는 달고나 할머니는 계절을 불문하고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한 번도 사 먹어본 적은 없지만 구운 고구마 냄새는 지하철 델리만쥬만큼 파괴력이 있었다.


식단을 해본 적은 없으나 신경 써서 먹으려는 마음은 있었기에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둥근 단면이 보이게 썰어서 에어프라이어에 구웠었다. 집의 고구마는 어떻게 조리해도 아무런 파괴를 이루지 못했다. 애초에 맛있으려고 만든 것도 아닌데 하며 넘길 뿐.


1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난다. 이제는 하도 읊어대서 아무 의미 없어진 기억이  난다는 말을 비웃듯이 군고구마가 따뜻하게 김을 내고 있는 것을 보니 내가 일전에 연애가 델리만쥬 같다고  얘기마냥 나의 1년은 군고구마.

세상의 고구마들이 1년 동안 검은 비닐 밑 땅 속에서 어떻게 자랐건 그래도 군고구마는 구워진다. 나보다 의미 있는 괄목을 이룬 저 구황작물의 노력에 빗대면 매우 빛바랜 내 노력들.


나는 노릇해지지도 않고 속이 알차고 달콤하게 채워지지도 않았기에. 느낀 격세와 감상이 무색하게 했다. 이제  구워지기 시작한  시기의 고구마들에게 내년의 너희랑 만났을 때는 얼굴 붉히지 않게 해보겠다고 새끼손가락도 없는 애들이랑 약속을 해본다.




8월 24일

꽃은 나비를 찾아 피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이 꽃이 나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한번 불행에 빠진 사람이 그곳을, 혹은 그것을 뒤로하고 겨우 떠났더라도 그 맛이나 온도 혹은 그 안의 공기나 분위기를 다시 마주했을 때 결코 모른 척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말하면 즉각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감정은 깊이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불행을 경험한 사람은 계속 불행하다. 불행이나 우울은 일반적인 감정이지만 감정의 심연을 계속해서 후비다 보면 뜻하지 않게 많은 정보가 산재한다. 이유야 각양각색이며 정말 각색을 해버린 이유도 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알던 예전의 어떤 타인은 한 번 맞춰 입은 옷은 다시는 그렇게 매치해서 입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게 정말 그 아이가 추구하는 미와 자아의 가치인지에 대한 가부를 누구도 대답하여 줄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의 마음에도 분서갱유를 시도했다는 정황이 상황으로 드러나면 숨길 수 없는 불쾌와 마주한다. 평면적 이미지를 만들어 편해지려고 하는 거 같아서. 내가 싫어하는 게 딱 이런 거 아니었나, 지 말만 맞다는 거. 지 신념에 필요 이상으로 취해있는 거. 그 이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심에 오버클럭을 걸어봐도 내 세상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기에 피하고팠던 걸지도 모른다.


교차검증을 시도하고 그 검증에서 내 견해에 대한 오류나 의혹이 발견되어도 상대에 대해서는 이성이 감정에게 매번 자리를 내주었다. 고가치한 일이라도 감정이 묻으면 무가치해지는 일이 잦았다. 나는 이번에도 이성과 손익을 철저히 하려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나 말 그대로 '감정' 평가사 앞에서는 무용했다.


9월 16일

진심을 숨기다 보면 결국 본래 진심이 뭐였는지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곤 때로는 스스로도 진심을 까먹고 싶어 숨기기를 줄곧 하다 보니 재료 소진이라고 둘러대고 하지 않았던 메뉴는 레시피가 소실되어 차림표에서 아예 지워져 버렸다. 마음을 전하는 일도 어느 정도 훈련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9월 17일

세상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처음 겪는 일의 즐거움을 때로는 경외로, 때로는 두려움으로 표기한다. 그 처음이 가져다주는 강렬함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때론 박힌 가시를 빼내기도 전에 살이 돋아 체화해버린다.


만사에 즐거움이 있고 호기심이 있는 시기에는 꼭 뉴스에서나 보던 못이 머리에 박힌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던가 돌팔이 침술로 온몸 들어간 침을 빼지도 않고 있는 사람처럼 처음이라고 하면 상흔도 모르는척하며 웃었더랬지.


9월 22일

색 잃은 나날들과 작별. 흑백의 사진들은 잃어버린 자( )감을 뜻 했고 괄호 안의 글자는 신, 존. 내가 적어 넣기 나름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진 추락한 것에 감사했다. 겸손은 한 번은 발이 바닥에서 떠야 나 모르는 곳에 피어나는 꽃이라 피우기도 꺾어 화병에 놓아두기도 긴긴 시간이 들었다.


9 28

무릎 높이에서 떨어져도 추락 아닌가?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있다. 무릇 날개 있는 자가  옆에 의연히 걷고 있다면 그가 적어도  번의 추락은 경험했다고 유추할  있지 않겠는가? 다리가 있기에 걸어 나가고 지느러미가 있기에 헤엄쳐나갈  있었을 테니.  발자국이 뒷걸음질이 아니었을 것이고 지느러미엔 후진 기능이 없듯  이가 날지 못해서 걷는 것이 아니겠거니 하고  걸음 함께 걸어주면 되지 않겠는가.


글 읽기 좋아하는 이가 누른 좋아요가 어떤 글로 데려갔다. 나는 내가 잃었음을 늘 인지하며 그만큼 채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릇의 형태가 어떻던 나는 매번 동일한 곳에 물을 길어 손수 날라놓았다고 기억했지만 불시에 확인해보니 양도 다르고 물의 탁도도 달랐다. 일전의 행위들에 비해 무엇이 우월하냐고 묻는다라면,


가치를 판단하는 일에는 이상하게 꼭 죄책감이 달려있다. 홀로 존재하는 이기심이 집단의 비선호 성품임을 부정하지 못하지만 한 쌍 이상의 비교를 통한 가치판단은 합리적인 해결 과정이라고 여겨지는 탓일까? 늘 떠올리는 저울과 앞뒤좌우위아래의 방향이 가지는 힘들의 충돌은 머릿속을 어지럽게 한다.


결국 보이지는 않고 수치화될 수도 없으며 1을 뺀다고 해서 1이 빠지지도, 2를 더한다고 2가 더해지지도 않는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실셈하는 과정인데 시세와 싯가가 매년, 매일, 매 순간 달라 나를 혼란케 한다.


그 와중에 내가 자주 겪게 되는 크게 부풀려진 가치에는 이제 피로도가 쌓이다 못해 염증을 지나 병이 될 지경이다. 다가가기 전에는 거대한 덩치로 보였던 그 가치는 내가 주위를 훑어본 후 심지어 속을 들어가 앞으로 걷기만 해도 반대편으로 나오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크기나 질량이 가진 에너지는 커녕 그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하는 사실이 너무나 지루해 나를 졸도하고 잠들게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도 촘촘한 거품기로 휘저어지고 있었다라는 뉴스가 이번 주에도 여러 번 왕왕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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