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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May 21. 2023

나도 유통기한 1억년짜리 약속 좀 해보고 싶다.

그렇다고 1억 년 동안 살고 싶지는 않은 마음.

가까운 거리는 걸어야지. 앞으론 남는 게 시간일 시기가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먼저 써진 5월 19일, 메모장에 쌓인 글의 빈도와 두터움이 내가 얼마나 파란색인지 알게 해 준다.

스물여덟까지의 5월 19일은 그저 내 친한 친구의 생일일 뿐이었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내가 가장 애석하게 느끼는 것은 기존에도 버벅대던 이해심이나 상대와 융화되겠다고 하는 다짐들이 점점 경직되어 간다는 것이다.


세상의 다양성은 내가 알지 못하는 범위의 것까지 다양함을 확장하고 있지만 정작 개개인의 선택권이 늘어감에 따라서 그 피로도는 가중되어 있기에 나는 더 완고한 태도로 타인의 영역의 문을 열었다.


경직되고 완고한 태도를 띄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가 타인의 문을 열고 입장했던 이유들에는 다양한 꼬리표가 달려있었다. 때때로 차게 식어 썩고 있을 줄 알았던 마음이 김이 나는 등어리를 가진채 문을 두드리기도 하며, 급한 용무를 처리하기 위해 들어간 시설은 내가 다시 돌아 나올 때 터무니없는 금액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 해석과 설명이 적혀있는 앞서 말한 꼬리표는 대부분 하트모양이었다. 해골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하트가 의미하는 건 뻔하고 뻔해서 차라리 뒤집어 복숭아나 엉덩이라고 얼버무리는 편이 재밌게 보였다.


이 폐허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고자 손과 발을 분주히 움직였다. 늘상 속상히 여기는 내가 삶에서 최소한으로 유지하던 연비조차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효율이었기에 행동을 서둘러야 했다.

남들과 같아지고 있는 것. 그것이 내가 찾은 기쁨이었다. 생일인 친구는 말했다. 자신을 성장시키는 일의 고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때때로 상대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야 할 때의 암담함에 이야기했다.

이해받고 기다림 받는 역할이 오래되어 타성에 젖어있던 것일까. 이해심의 깊이가 터무니없이 얕아 스스로가 경악할 정도였다. 내 멱살을 내어줄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으나 내 손아귀의 힘은 턱없이 약했다.


산에서 자란 아이와 바다에서 자란 아이.

비유를 좋아하는 내가 부쩍이나 많이 하게 된 말이다. 나무를 바라보아도 그들에 마음에 떠오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을 테다. 사고방식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다가 스물여덟의 초여름 나의 중론이다. 바다의 모래는 산의 흙이 아니고 바다의 해수는 산의 샘물과는 다르다.


오늘은 운이 좋네. 기다리는 일 없이 버스도 타고 지하철 환승도 내가 계단참을 다 내려가니까 플랫폼에 열차가 들어왔어. 이런 소소한 행운들이 행복의 전초일까? 그렇다면 이런 소소함의 빌미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난 불행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불쏘시개뿐인 삶일지도.


사건과 상황들을 겪으며 나의 선입견은 다시 담금질된다. 편견과 선입견의 인간. 그게 바로 나니까. 강화된 시선과 망설이는 손길들을 가지고 올해도 살아질 것이다. 이제 나는 낙천적인 사람들을 멀리 할 생각이다.


내가 너에겐 재앙이었을까. 평온했던 너의 삶에 내가 괜한 파문들을 만들어 잘 담겨있던 물을 넘치게 했을까.


아주 짙은 파랑. 채도를 올리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도 쓰이지 못할 탁한 색의.


5월 10일

대충 전쟁과 같이 살았으나 전리품이 터무니없고 그것을 전시할 미술관 또한 볼품없다.


습관적인 패배감의 향기가 방 안에 짙고 낮게 깔렸다. 내가 몸을 누인 침대의 높이만큼 향이 올라올 쯤이 내가 이불을 박차고 바닥의 집기들을 주워 정리하는 게 일상적인 해소법이었는데. 극복의 때가 다가옴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기다리던 때가 와도 그렇게 기쁘지 않을 것만 같다.


5월 12일

오늘의 나를 서술해놓으려고 했다. 그토록 닿고자 달려왔으나 닿았던 벽은 내가 예상한 질감이 아니었다. 오늘을 기억하기로. 거울 속 붉어진 얼굴을 마주하면서.


알러지? 알러지가 심하대 피부염이라고 그랬나, 근데 환절기마다 이러는 건 정말 너무하네 하며 얼굴에 흉터를 지우는 날도 아닌데 피부과에 갔다.

꼭 코 세게 닦고 밥 먹고 입 마구 닦는 사람마냥 붉은 얼굴에 대한 진료를 마치고 나왔다. 일주일 하고 반정도 후에 또 피부과에는 와야 했다. 그건 아주 오래된 흉터였으나 싫은 이야기를 내뱉는 자의 지적이 기억을 깨웠고 흉터는 지우려는 마음에 걸맞추어 한 달에 한 번. 딱 3개월치 정도 지워졌다. 마음속 많은 거스럼들을 지웠으나 정작 눈 옆 흉터에는 무관심했다는 게 내심 웃겼다. 내실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었지만 괜찮았다. 마음먹으면 지울 수 있는 것이랑 마음먹어야 지울 수 있는 것은 시기적인 차이가 좀 있어도 괜찮았으니까.


한편 나의 피를 철철 흘리게 했던 외과치료도 2주 정도만 더 나가면 통원치료마저 끝날 거라고 했다. 지긋지긋한 컨디션으로 두 달을 살았다. 싫은 감정이 남았다. 아픈 것도 싫고 아픈 상태에서 하드모드로 삶을 밀어 넣은 나도 너무너무 싫었다. 여유 없이 살아가는 것을 덕목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20대 초의 내가 정말 싫고 미웠다. 목 졸린 삶은 많은 의문들을 낳았다. 상대방이 대한 믿음을 어떻게 확인받을 수 있겠어요? 상대방이 정말 착한 이인지 어떻게 내가 확신할 수 있겠어요? 불안정한 일상의 상태를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겠어요? 답 또한 근처에 있었다. 믿지 못하는 자에게 믿음 주는 자 없으니.


5월 16일

가격을 싯가로 매기는 장터에 나가보면 첫 대면에 으레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이 말에 대한 우리의 대답도 정해져 있다. 얼마까지 해주실 수 있는데요?


눈탱이도 맞고 우연히 진귀한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사게 되었던 시기가 지나고야 알게 된다. 감정을 거래하는 시장에도 시세가 있고 적정 가격이 있음을. 누군가에겐 감정과 거래라는 말을 붙여놓은 것에 대해서 우선 설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 이 물건을 이 돈 주고 사기엔. 극단적으로 표현한 그돈씨. 내가 아반떼 N을 사던 말 그대로 C클래스를 사던 그건 순전히 내 맘 아닌가. 그러나 사람들은 부르짖는다. 그돈씨.

진심에 비웃는, 진심에 스스로 조소를 보내는 유머가 많다. 마치 언젠간 저 뛰어난 공돌이도 공짜였다느니. 나에게 그런 밈들은 언젠가 배신할, 언젠가 배신당했던 그들의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너무도 슬퍼 어설피 치장해 놓은 웃음거리와 슬픈 전단지 그 어디쯤으로 느껴진다.

일률적인 글의 주제를 말하는 패턴 또한 일률적이다. 내내 비슷한 감정과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처리하는 나, 그리고 그 생각들의 비슷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 그런 움직임들 또한 간헐적으로 일어나 자력구제를 해보려 하지만 될 리도 없고 그다지 효과도 없는 모양새다.

적당한 것들에 대해서 쓴 글들이 쌓여가는 것을 보면 나는 적당함에 관심이 참 많은 사람 같다. 어쩌면 당연하다. 최저가.라는 가슴을 떨리게 하는 한 단어. 몇 년 후의 나는 최고가.라는 말에 가슴이 떨렸으면 하지만 최고가를 내놓는 식탁보다는 최저가를 골라야 마음 편했던 일이 이미 평생에 걸쳐 있었는데 사람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개개인이 낭비를 생각할 때 어디까지를 합리, 어디까지가 낭비라고 생각할까? 내가 외출 한 번에 한 장씩 쓰는 덴탈 마스크. 누군가한테, 혹은 어느 시점에 이건 낭비 었을 테니까. 마스크를 요일을 정해서 팔고 천을 찢어 입에 두르는 곳에서는 낭비로 보였지 않을까.

지속되는 즐거움 없는 내 삶의 즐거움 중 그나마 취미라는 이름에 가까운 행위는 어떨까. 바람을 막아줄 좋은 보금자리나 음식을 얼거나 상하지 않게 해 주는 철제 상자 등이 없었을 때는 어떻게든 에너지를 아끼는 게 미덕이었을 텐데 굳이 무거운 쇳덩이를 모아둔 곳까지 걸어가서 가만히 바닥에 놓여있는 쇠들을 들어 올려 정해진 궤적을 따라 수직 운동하곤 일부러 상하게 한 근육에 전부 다 흡수되지도 않을 영양분을 때려 넣는 것.

이거야말로 정말 자기 파괴적이고 낭비적인 행위가 아닐까. 그 운동을 좋아하고, 안 하는 날엔 괜스레 불안하고 시간만 있으면 자연히 발걸음이 향하는 나조차도 현대가 가져다준 이기이자 낭비적인 취미라는 생각엔 이견이 없다.

주 3~4번의 90분 정도의 시간. 그리고 소소한 장비와 짐 회원권. 그 정도 비용은 내가 얻을 다양한 즐거움에 대한 비용으로는 아깝지 않았다. 적어도 삶 자체의 흥미도가 떨어지는 내 삶에서 적정하게 예산이 책정되었다고 생각했다.


돈이 많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짧은 평생에 걸쳐서 많은 파편과 내가 경험할 수 있던 짧은 경험들로 미루어 그 느낌을 이렇게 정의했다. 세상이 공짜인 것.

그것은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소비 및 생산 행위들이 나 자신의 내일, 다음 주. 그리고 내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었다. 낭비라는 견해도 필요 없었다. 그저 나의 호 혹은 불호로 소유와 비소유가 결정됐다.

나는 이 마음들을 가지기 위해 얼마나 지불했었나? 혹은 앞으로도 지불할 용의가 있나. 고정지출은 돈이 아닌 곳에 적용되면 곧 책임이라는 말로 번역된다.

지불이라는 말을 책임으로 대용시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거지가 퍽이나 많다. 다 거지들 밖에 없다. 지불 못한다. 이미 만료되거나 잔고가 없는 카드니까.

혹은 내가 생각하는 지불의 범위가 그들에겐 낭비나 무의미한 과소비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전혀 과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아니었으니까. 위험을 생각하고 최악을 상정하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시도조차 하기 싫어지는 무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나에게도 너무 힘들었다.

내가 지불할 가격은 늘 높고 나는 그 지불에 대한 용의가 언제나 있었다. 책임지지 못할 일들을 만드는 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지불을 당면했을 때는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싯가를 부르는 상황들이 생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판매와 구매를 겸하는 상대의 비용까지 같이 합산해서 지불해야만 했다.

주어진 토양 위에서 윤택을 지향하나 낭비로 정의된 취미를 가지게 된. 지불의 부담을 늘 지고 있지만 늘 싯가를 부르는 장터에 나가는. 아이러니를 버티는 게 쉽지만은 않다.


마음에 밸브를 달아야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모든 요리는 중불이 기본이거든.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도구가 유용한 것이지 내가 용법의 정도를 도구에 맞춰야 한다면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5월 초에 할 일을 마치고, 그리고 나를 성가시게 하던 일들을 온전히 떼어낸 후에 정말 말 그대로 백수가 된 내가 해가 뜬 후에 잠을 자고. 해가 무르익고 떨어질 때쯤 일어나 과영양을 섭취하고 무의미한 금속과의 시간을 보내고 아직 지치지 않은 정신. 그러나 이성의 썰물에 드러난 지친 감성을 적는 시간이 위선적이다.

자기 생각도 감각적으로 적지 못하게 된 오늘이 비단 오늘만의 일일까. 부디 그렇기를 바라고 있다.

아직도 나는 시점을 어디로 맞추어야 될지 모르겠기에 그렇다. 본성인 염세의 필터를 끼우고 세상을 바라보기엔 내가 20대의 어느 날. 전공으로, 직업으로 선택하겠다고 결정한 분야에 불리한 면이 너무 많다.

골통 내부에서 바라보는 나와 내가 한 세 발짝 정도 옆, 혹은 뒤에 세워둔 내가 보는 세상이 달라 그 둘을 어찌 친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 라따뚜이처럼 나의 조종간을 쥐고 있는 이의 눈에 비친 멋들이 세 발짝 떨어진 이 눈에는 프릭쇼로 보일 때도 왕왕 있어서 그 간극을 맞추려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 두렵다.

노력이나 합의, 협의라는 것들은 사람 질리게 하는 것들이니까. 말이 좋아 노력, 합의 같은 말을 쓰는 거지 결국 한쪽이 포기하는 게 많아지는 순간 그것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지 않았던가.

어지르는 사람과 치우는 사람. 환기하는 사람과 꾹 닫힌 창문을 좋아하는 사람. 결국에는 혼란함이 이긴다. 생전 창문을 열지 않는 사람이라도 옆집 유리창이 박살 나고 비명소리가 들리는데도 안 열고 배기겠나.

내가 절제라는 이름 아래  그었던 시간. 넘으면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황폐한 땅과 구분하는 선이라 여겼으나 오늘에 이르러서야  재고하네, 자유로운 비행이 바람과 연의 합작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사실은 가느다랗디 가느다란 연줄이 연의 추락을 막아주고 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5월 18일

표리부동한 자가 살아가는 법


늘 비판적인 태도를 일삼아야 했다. 왜? 바로 생각을 두 개를 만들어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내가 볼 것이랑 남에게 보일 것. 이렇게 써두고 보니 무척이나 교사의 역할과 비슷하다. 하지만 사회 통념상 개인이 개인에게 의견을 전달하거나 가르침을 주려고 할 때에는 메시지 그 자체보다는 발화하는 메신저의 지위고하가 더 많은 영향을 준다고 본다. 누가 누굴 가르치는가. 맞다, 누가 누굴 가르치는가. 나에게는 선생이며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은사가 누구에게는 밥그릇 뺏은 나쁜 놈일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진심은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일 수 없다. 죽음도 저울질해야 마땅한 세상에 어디 진심 따위가 가격표를 떼려고 하나.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달린 태그처럼 살짝 가려주는 정도의 배려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의 최대치이다.

그렇다면 그 모양은 개인이 어디 서 있는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내가 코끼리의 뒷다리를 만지고 있는지 이게 설령 하등 관계없는 기린의 다리라도 눈을 가린 채로는 알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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