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간절히 바라는 건 잘 안 이루어진다
손톱은 항상 바쁘고 가장 힘든 날에 자신이 길었음을 눈치채게 만든다.
어쩌겠는가 손톱은 계속 자라고 내가 뽑아 없앨 수도 없다. 길게 자란 손톱은 불결하다. 그리고 불편하다. 내가 얼마나 손을 자주 씻고 고운 일만 해 손이 얼마나 놀아나던지 간에 사실과 경험은 짧은 손톱을 원한다.
네가 지친 나날이라고 나를 그대로 두진 않겠지, 내가 길면 너도 불편하지 않냐 등의 조롱을 하며 손톱깎이를 들게 만든다.
코 위가 번들번들하고 눈이 뻑뻑하건 말건 내가 오늘 이 개인위생을 위한 행위를 거른다면 내일 전화기 스크린, 종종 치게 되는 자판, 그리고 흙을 만질 때조차 오늘 밤을 후회할 것이다. 정말 불편한 거니까. 손이 불편하다는 건.
다 싫고 힘들다. 미운 나이 4살. 나는 24살이나 많은데도 미운나이. 지금의 행복이 내일의 행복이 아니고, 내일의 불행이 오늘의 불행이 아닌 삶.
그나마 감사할 것을 찾다 찾다 찾아보면 사회간접자본은 서울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숲 속이나 바닷가에 태어났으면 안 됐다.
새벽에 2시간을 넘게 걸어도 걸어도 가로등이 있고 3분마다 편의점이 있는 곳이 나에게는 맞다. 속단할 수도, 예상할 수도 없지만 오히려 내가 겉돌 수 없는 곳에 태어나 자랐다면 그런 고립감이 나를 성장시켰을까? 고독감이 사나이를 키운다는 말은 나에게 적용이 더딘 것만 같다.
고독한 일들은 싫고 무섭다. 나는 늘 보조자 없이 고중량에 깔리는 상상, 흙을 만들다 토련기에 손가락이 말려들어가는 상상. 내 맞은편에 달려오는 차가 이유가 뭐가 됐건 방향을 틀어 나에게 달려드는 상상을 한다.
최악은 두려움을 부르고 두려움은 조심성을 부른다. 조심성은 세월 속에서 예민이 되고 만성적인 과민이 됐다.
글은 늘 물리적인 키보드를 두드려 쓴다. 종이에 적는 편지조차 퇴고를 거친 전화기 메모장을 응시하며 손에 쥔 펜으로 쓴다.
그래서인가 나는 도통 스크린을 두드려 쓰는 글에는 영혼을 느낄 수 없었다. 성질이 급한 생선은 물에서 건지자마자 죽어버려 회로 먹기 어렵단 말처럼 뇌에서 떠오른 말들이 엄지만을 이용한 입력으론 금방 생기를 잃는다. 그런 글을 전달하고 나면 그냥 상대가 먹고 탈이 나지 않는 체질이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가늠하는 일엔 기준이 필요했다. 기준점을 세우고 그 우위에 위치했는지 미달이 되어 저열한지를 판단했다. 늘 하는 일엔 가늠자가 없었다. 그만큼 일상적이고 명료해 무언가를 측정하고 조절해서 할 능동적 가치를 잃은 것들이었다.
익숙해진다는 것에 사랑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어 쉽게 입을 뗄 수 있었지만 익숙한 일들에 감사를 느끼는 이들의 성품은 내가 쉬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전동칫솔을 쓰지 않았던 때와 쓰고 있는 지금의 차이와 같다.
전동칫솔이 받은 환영과 일반적인 칫솔이 받은 사랑은 비할 데 없는 각자의 매력에 있었으나 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냐는 개인의 영역에 속하였다.
교합의 문제나 이 사이가 좁아 신경 써서 닦아야 하는 부분은 늘 스트레스였지만 사랑받는 도구는 이내 잘 해냈다. 내가 이 덜덜거리는 친숙하지 않은 이 기계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별의별 용도를 소화하는 아이폰을 쓰면서도 드는 생각은 도구는 주어진 도구로의 역할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칫솔은 이를 잘 닦아내고, 칼은 적합한 곳을 잘 절삭해 내고. 공예가는 심미성을 가진 작업물을 만들어내면 되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말을 들어주면 되었고 나는 듣고 싶은 말을 하면 되었다. 나는 들어주면 되었고 그들은 듣고 싶은 말을 하면 되었다.
참 신기하도다 획 몇 개와 동그라미들이 이런 맛을 지닌 하나의 문단으로 변하다니!
역할을 너무 잘해주고 있어서 뒤로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예전 글을 읽으면 원인 모를 분노와 수치심이 들지만 그런 내가 있었기에 오늘 이런 배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들 제 역할을 너무 잘해주고 있어서 그럼 그들의 총집합인 내 역할은 뭔가 늘 생각해 본다. 이런 일을 그만하게 해주는 것이 그들의 염원이라면 나는 내일이라도 죽어버릴 수 있다. 그만큼 그들의 역할의 충실도에 나는 늘 감복하지 뭐야.
고단하다면 고단할 수 있었던 하루를 마치고 긴긴 노선의 버스에 올라서 버스 좌석의 헤드레스트에 목을 기댔다.
다행감이 있었다. 뇌를 파괴시키는 외부요소가 아닌 고됨이 지나간 후에 오는 다행스런 마음이 진정한 안정에 닿아있다. 삶은 사진이 아닌 동영상이기에 맞닿은 마음은 순간의 기록으로 남았다.
평온하라고 해서 평온할 수 없고 혼란하라 해서 혼란할 수도 없기에 언제나 마음으로 달달 외우던 문장. 나는 불안한 맨틀 위에 떠있는 판 위의 작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는다.
습관과 관성에 혼재된 진심을 구별하는 법을 정말정말정말 알고 싶다. 고깃국 위 거품처럼 갈망, 그리움 따위는 걷어내 버리고 차갑게 만들어 가장 맛있는 평양냉면을 내놓듯이 진심을 담은 한 그릇이 알고 싶다.
강남역에 이상한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이 필연적인 상태인가? 총량이 늘어남에 따라서 불순물의 함유도 늘어남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강남역 거리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다 보면 오히려 내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불순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품은 스스로를 탈락시키진 않겠으나 나는 눈을 꾹 감고 버스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습관은 행위를 상회하는 무지 많은 횟수의 행위가 이루어진 후에 정착된 일종의 검증된 안전한 방식에 가까운데 입력된 오래된 습관과 방식이 스스로의 행동에 신뢰를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발은 오른쪽부터 신고 양치는 왼쪽부터 해. 알약을 먹을 때는 꼭 혀 밑에 알약을 먼저 털어놔.
어떤 습관은 성품이 되어 나를 구성했지만 웃기게도 나는 사랑이야말로 그런 습관을 상쇄하는 에너지라고 생각하며 내가 정해놓은 규칙들을 다 어기고 현판도 뜯어 송판격파하듯이 박살 내는 사람을 기대하기도 했다.
투영하는 일은 나쁜가에 대해, 투영이라는 말이 가진 어감, 개인적인 맛의 받아들임은 저울에 달아보면 부정의 감정이 무거운지 아래로 내려왔다.
미묘하지만 그 부정의 느낌은 어디서 왔을까 따라가 보면 아마도 내가 중시하는 자주적이고 주도적이며 생각의 주체자체가 본인에게 있는 상태와는 상반된 상태를 나타내기에 그렇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투영이랑 비교가 어떻게 다른가 생각해 보면 투영은 모습을 감추는데 그 의의가 있다. 나는 감추고 상대를 드러내 내가 원하고 바라는 면을 찾아 주목해 놓는 것. 반해 비교는 내가 그 사람 곁에 가서 서야 했다. 어찌 보면 투영이 비교보다는 비열한 행위였다. 나는 비열한 자. 늘 투영을 일삼았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인 화차. 내용은 별거 없다. 다 잃은 여자가 뭐 하나라도 얻어보려고 몸부림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본래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집념은 결국 정황과 다른 이의 기억에 의해서 꺾인다. 그녀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신을 투영했다. 투영에 그치지 않고 이름, 생일 그리고 삶까지 송두리째 훔쳐 평범한 삶의 여자가 되고자 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사랑 주는 이들에게 나를 늘 투영해 본다. 그냥 강아지를 만나면 귀여우니 쓰다듬는 그런 거 말고. 내가 미안하다고 하며 고마움을 건네어주면 미안함은 물러주고 고마움을 집어드는 사람이 있다. 내가 조소를 보내며 실제론 주춤할 때 환히 웃어주며 두려움을 털어내 주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들을 닮고 싶어 키를 늘리고 줄이고 코를 높이고 낮추어 봤지만 비슷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투영으로 안되니 의탁을 택할 때면 그들이 웃으니 나 또한 웃고 있다고 생각해 입꼬리가 인색 해질 뿐이었다.
네가 될 수 없다면 나는 무엇이 돼야 했을까. 지금의 나는 내가 내가 되길 바란다. 미감이 후달리는건지 심히 괴상한 모습을 한 나의 스물여덟의 콜라주. 구태의연, 혹자는 그리 말할지도 모른다.
결정론적으로 이런 상태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평안함으로 도달한다 우리가 늘 느끼는 불안과 슬픔도 존재의 소멸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충실한 이들도 전부 사라진다는 것이다. 필멸은 즐거운 일이다. 공평하게 행복도 불행도 모두 끝나버린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한정적인 시간 위에 우리의 안녕이라는 말이 얼마나 아린지! 우리나라도 만날 때 헤어질 때 인사가 달랐으면 좋았을 텐데. 헬로, 굿바이. 곤니치와, 곰방와. 사요나라. 안녕!이랑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