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짚어보는 가족의 질감
우리는 더 이상 조선인처럼 사고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카우보이나 영국식 부르주아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기본 OS로 두고 사고한다는 점이다. 자유와 가치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 서구에서 정립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안쪽에 내면화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근대적 혈연 기반 가족 체제에서 우리는 이미 벗어났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외화를 소비하며, 로켓배송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더 이상 촌수를 따지고 항렬을 나누며,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는 인습에 대해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세대 차이가 아니라, 삶의 구조 자체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족도 경우에 따라서는 철저한 남, 혹은 남보다 못한 타인인 경우가 명백함을 시사한다.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씨의 삶에 대한 나의 내 시선이다. 두 차례의 **과 ****,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여러 부작용은 결코 친인척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현대적 인간관계, 특히 현대적 가족의 본질은 돌봄과 책임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서적 보호와 경제적 책임이 결여된 관계에서,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존경과 헌신, 더 나아가 도리로서의 예의까지 기대하는 것은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들과 나를 구분 짓는다. 이는 계급적이거나 지식적인 우월 의식이 아니라, 그들과 나 사이의 삶의 태도와 책임 감각에 대한 간극을 강하게 느낀 후의 분리 선언에 가깝다. 나의 조부모가 타인의 실패를 자신의 인생의 짐으로 끌어안아 왔던 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 실패들에 대해 그 어떤 귀책도 없다.
그들의 이전 삶이 지닌 기구한 역사와 조건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듯, 조상이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말은 현실감이 매우 떨어지며 나에게 있어는 친부와 친모에게까지만 유효하다.
나는 광범위하게 가족이라 불리는 이들의 삶에 연민을 가질 의무가 없다고 느낀다. 그들을 철저히 타인으로 인식하게 된 이후로, 오히려 일말의 섭섭함이나 적대적인 감정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가족이라 불리는 이들의 직간접적 과실로 인해 실제로 안위가 위협받았고, 내가 인정하는 가족이 붕괴 직전까지 몰렸으며, 구성원들이 심리적으로 소진되었던 시간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책임을 떠안는 불공평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아직 온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로 경험한 모두의 마음속에 불쾌하게 잔존해 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어 온 폭력과 불합리를, 나는 자기 보존을 위해 더 이상 감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통나무를 함께 드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왜 그의 통나무를 함께 들어야 하는가. 가족이라는 희미한 가치 안에서 이루어지는 총량제식 고통 분담에 더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하는 연민의 한계는, 타인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지고 있는 나의 사랑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데 있다. 만약 이러한 불합리가 가족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라면, 나는 그 구성체로부터 과감히 떠날 것이다.
나는 지금의 나의 태도가 병적이거나 편집증적인 냉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체념적으로 만성화된 혈연 구조 속에서 나의 이름을 지우고, 사회적 관계로서는 최소한의 이해와 예의를 유지하되, 가족으로서의 관여는 중단하겠다는 종언이자 선언이다.
조용한 거리 두기가 가져다 줄 잔잔한 편안함을 기대한다. 종종 DNA를 공유한 몇몇 타인들로부터 전근대적인 가족관의 잔재를 엿보게 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인생일 뿐이다.
나의 동생들은 건강한 가치관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책임감 있게 살아가고 있다. 태어나지도 않은 나의 아들을 적어도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감사하게도 나의 부모는 그러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 가족의 시간을 정리한다. 대는 이어질 것이고 가족은 나의 앞으로의 인생에서 기능과 책임을 갖춘 감정선을 공유하는 건강한 관계로 존재할 것이다.
조상과의 유대가 사라지는 일은 슬픔이 아니다. 죽은 자는 말은 산 자에게 결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 보이지 않는 소통에 가치를 두고 있는 인물들의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가치는 나를 포함해 이 일을 여기까지 이르게 한 모든 이들의 선택과 행위가 누적된 결과이니 아쉬움조차 거두어져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사회적 의례는 지킬 것이다. 관혼상제에서 애도를 표하고 축하를 전하겠다. 다만 그 이후에 따라오는 감정 노동과 구조적 책임까지 감내할 의지는 없다. 그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거세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상태와 이후에 벌어질 일들에 또한 특별한 온도도 감정도 없다. 그것은 무감각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결과에 대한 수용에 가깝다. 아무도 특별히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상태. 그 정도의 평온을 바란다. 서로 존중하며 방해하지 않는, 방해할 수 없는 그런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