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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Dec 03. 2021

멋지게 도달하지 못하면 죽는다. 삶은 줄곧 그랬다.

2020년 6월 11일

세상 속에는 멋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내가 죽어버리고 싶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멋 안에 속하지 못할 것을 애석하게 여겨 죽고 싶은 것이다. 다른 것이 이유가 아니다. 이해 못 해도 상관없다. 100개의 가정, 100가지의 불행. 진리다.


앞선 이유를 좀 더 길게 풀어쓰면 내가 생각하는 멋에 도달하기에는 나는 이미 글렀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젠틀, 모럴 같은 단어와 함께 그곳에 오르기에는 갖추어진 것이 너무 미흡하지 않은가. 누군가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손아귀를 망치로 짓이겨야 속이 후련해진 채로 나아가고 올라갈 수 있지 않겠는가. 고령토가 나지 않는 곳에서 어찌 순수한 백자를 만들겠는가. 본차이나, 결국 암소의 뼛가루가 유럽에서 백자를 만들어냈다.


나의 삶에서 백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내 뼈를 몽땅 갈아 넣어도 부족하다. 또 하필이면 나는 기민한 사람이다. 쉽게 알아챈다. 생각 속 기민은 삶 전체에 통찰력을 가져다주었다. 왜 그들이 고통과 비관 속에서 목을 매었는가! 남들이 울창한 숲의 건장한 나무를 볼 때 예리하고 민감한 그들의 동공은 벽난로 속에 볼품없이 처박혀 있는 장래를 목격한 것이 아닌가!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데 흰색 포르쉐가 내 앞을 앞질러 갔다. 파나메라. 차라리 빈지노가 가사에 파나메라를 쓰지 않았다면 그 차의 가격을 아는 일이 꽤 머나먼 나중의 일이 었을지도 모른다. 비교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가치다. 내 주먹밥이 옆 친구 것보다 조금 더 클 때. 이후 다가올 배부름은 만족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의 기준이 너무나 뒤틀렸다. 내가 이런 이야기만 꺼내면 화는 항상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해준다.


가능성이 아깝다. 내 시간이 아깝다. 입맛대로만 해석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이 모순적이라서 역겹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에 동의하지 못하고 동조하지 못하는 나를 지켜보는 내가 안쓰럽고, 그것을 겪는 내가 비참하다. 기분의 팔짱은 단단히 끼워져 있다. 주인도 풀 수 없는 지경.


동물의 진화는 슬픈 것이다. 먹이가 무엇밖에 없어서 부리가 어떻게 진화했고 날씨가 이래서 색깔은 이런 모양이 되었다. 여유로운 선택지가 없는 적응은 슬픈 일이다. 순응하기 싫어 있는 그대로의 나는 숨는다. 내 방의 커튼이 두텁다.


잘하고 싶어서 몇 주간 크기가 들쭉날쭉한 컵을 100개 남짓 성형하고 정형했다. 입시 그림이긴 했지만 그림을 무진장 많이 그렸다. 물론 학원의 스케줄을 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저 할 뿐. 만족스럽지 못한 입시였지만 내가 배운 정신적 가치가 컸다. 호사다마 아니겠는가.


20살, 당시 주위 친구들이 받던 시간당 페이의 두 배가 넘는 돈을 받고 파트로 고등학교 미술반 강사를 할 수 있었다.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고 받은 돈은 입대 전 일본으로 9박 10일 동안 여행을 갔다 와서도 남았다. 24살, 기회가 또 왔다. 미술학원에서 주말마다 바삐 일했다. 더불어 정신없이 전공에 매진했더니 전공을 살려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21살의 일본을 떠올리게 하는 그 고등학교에서는 정식 겨울방학 방과 후 교사 계약서를 내밀었다. 흔한 관용구처럼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하지만 난 죽는 게 목표인 사람. 자꾸 삶이 살려놓는 건가 하는 의문에도 빠져본다.


비관 속에 살다가 숨통을 트려고 적어 내린 일들은 인과관계가 명확하다. 내가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보상은 삶 전반에 걸쳐서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어떠한 선에 다다르고 나면 발바닥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나를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이 있는 건가?


그래, 쟁취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 그것이 죽어도 좋고, 내가 죽어도 좋다. 때가 오면 내가 죽는 게 나으리라. 그것 없는 삶은 나에게는 의미 없으니까. 삶의 의미가 단 하나는 아니지만, 또 그것만 한 것을 들이밀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숱한 나의 글 속 피사체. 흰 천으로 잘 덮어 구석으로 치워둔 그들. 난, 기만. 기망.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나는 부끄럽다. 내가 되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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