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3일
과일이 먹고 싶어져서 새벽을 지새우고 해가 뜨자마자 냉장고에 있는 오렌지를 꺼내어 먹었다. 칼질할 때 팔이 아픈 이유는 어머니가 끊은 쪽 팔의 림프선 때문이 아니라 잘 들지 않는 칼 때문이라고 마트에서 강력하게 주장해서 샀던 독일제 쌍둥이 칼은 아주 잘 들어서 쓸 때마다 기분이 좋다. 비록 사려고 든 이유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결과적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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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렌지는 철이 지났다. 봄 과일은 여름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 맛이 없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매일 오렌지를 대여섯 개씩 먹던 이번 봄의 오렌지는 유독 더 맛있어서 나의 입맛을 돋웠으니까, 혹은 인공적인 기분을 먹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또 다른 나의 눈엔 자연에서 난 과실을 입에 처넣는 게 마음에 들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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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먹기 힘든 과일, 손이 끈적해지지 않고서는 깔끔하게 먹기 어려운 과일. 먹고 나면 꼭 과육의 섬유질이 이에 껴서 급식으로 나오는 날에는 곤란했던 과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둔지가 오래된 탓인지 껍질이 말라있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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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그냥 나는 내 입 속에 자연의 것을 집어넣고 싶은 것뿐이니까. 나도 생기를 간직한 무언가 임을 일깨우는 행위의 일환으로. 오렌지를 반으로 자르고 그 반구가 되어 드러난 과육을 또 반으로 자르고 다시 반으로 자르면 오렌지는 8조각의 먹이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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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오렌지 세 개를 잘라 선 채로 그 자리에서 먹어치웠다. 먹었다기보다는 한 조각에 한 번씩 깨물어 본 후 버렸다. 스물네 번의 입술의 움직임이 있은 후 맛이 수분기 없던 껍질을 배신했음을 알았다. 오렌지는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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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 박스를 따뜻한 바닥에 놨다가 아래 깔린 귤이 모조리 상했던 기억이 난다. 문득 입가와 손끝이 따가웠다. 오렌지는 산성이니까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며 입을 닦는데 따뜻한 귤 박스의 아래에 있던 귤의 냄새가 났다. 귤은 초록색으로 변하고 당분이 말라붙어 희게 변했었기에 그런 냄새가 날 법도 했지만 내가 먹은 오렌지는 살짝 마른 것 외에는 이상이 없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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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의 심지는 껍질을 배신하지 않았다. 자신이 철 지난, 철 지나고 있는 과일이 된 것을 깨달은 오렌지의 꼭지와 이어진 심지는 그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과육은 영문도 모른 채 여전히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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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이 없어 끼니를 숱하게 거르고 그에 따라서 기력이 쇠했던 시기에 봄의 오렌지는 고마운 과일이었다. 이틀에 한 번. 밖에 나가는 유일한 일이 오렌지를 사러가는 일이었을 만큼 좋아하게 됐다. 한 그물망에 8개의 오렌지. 만 원. 영원히 달콤한 봄의 오렌지. 흐르는 과즙이 대수랴. 끈적해질 손이 문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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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오렌지만큼 좋아한다고 말해야겠다. 눈치 있는 오렌지 꼭지와 심지처럼 영악하게. 시간이 지나 껍질이 바싹 말라가더라도 물정 모르고 한 없이 달기만 한 마음을 감추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