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소풍

여섯 권의 일기장

by 송담

9.저런 어르신들이 어디서 생기엇나


2011년 3월 26일


오늘도 깃부고 즐거운 좋은 하루 데주세요

오늘도 참 좋은 하루엿섯다

큰아들도 오고 작은아들도 오고 손자도 왓섯다

내가 요번 주에 누가 올가나 하엿는데 내 기분이 좋앗다

장도 담그고 시장도 보앗다

아구 사다 아구찜도 해서 마싯게 먹엇다

나는 잠 자는데

두 형제가 오순도순 이야기 하는거 보니 내 마음이 깃벗다


2011년 4월 3일


오늘도 재수 대통하게 해주세요

오늘도 좋은 하루엿서다

기분 좋으면 데는거지 뭐

사는게 뭐 별거드냐 몸 편하면 데는거지

오늘도 하루가 지나갓구나

밤 10가 데엇구나

일직 자고 국악 불르러 가야지

내가 이렇게 한가롭다니

팔십이 넘어 할 일이 업고나


2011년 5월 5일


오늘도 좋은 하루 데주세요

내 아들 딸들 8남매가 잘 자라서 효도하여서 나는 고맙다

덕산 온천 가고 싶엇는데 온천도 가고

마신는 음식도 사고 봄 옷도 사고 구두도 삿다

8남매 키우느라 고생도 하엿건만 그런 생각 조금도 업고

저런 어르신들이 어디서 생기엇나 어디서 오셧나 하면서

깃부고 즐거운 생각 뿐이로다

8남매 유순예 생전에 잘 살아다오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다오


엄마는 이제 아팠던 다리도 다 회복하여 기쁘고 즐거운 날들을 보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마음이 한가롭고 여유로움도 생기신 것 같고 모든 일이 흡족하십니다.

든든한 아들들이 손자까지 데리고 와서 장도 담그고 맛있는 아구찜도 해 드셨답니다.

서산이 고향이다 보니 신선한 해산물들은 우리 식구들이 제일 좋아하는 식재료 들입니다.


시원한 아구찜은 남동생의 주특기 요리입니다.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주방을 장악하고 요리 솜씨를 뽐냅니다. 덩치가 산 만해 가지고 주방에서 소꿉놀이 하듯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면서도 귀엽기만 합니다.

그렇게 작은 아들이 요리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두 아들이 술 한 잔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정경을 옆에서 보니 얼마나 흐뭇하셨을까요. ‘내 마음이 깃벗다’라고 적으실 정도로요.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풍경입니다.


4월 3일의 일기에는 ‘팔십이 넘어 할 일이 없고나’라고 적으셨습니다. 열두 식구 대가족의 그 떠들썩하고 방만하기만 하던 살림살이가 다 지나가 버리고 이제 할 일이 없으시다니요.

밥을 해도 가마솥에 한 솥 씩, 국을 끓여도 큰 가마솥에 또 한 솥씩, 나물을 무쳐도 한 바가지씩, 김장을 해도 이백 포기씩, 동치미 항아리는 또 얼마나 컸는지요. 해마다 담그는 고추장 된장도 몇 항아리나 되었고 장아찌며 짠지며 호박 고치며 시래기며 계절마다 갈무리해 놓아야 할 음식은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뿐일까요. 열 두 식구의 입성을 깨끗하게 챙기는 일은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었는지요. 부전자전으로 성격이 깔끔하고 까다로우셨던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바지저고리 적삼 두루마기를 철마다 지어서 떠르르하게 차려입고 외출하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마루에 등잔을 켜고 앉아서 밤새워 다듬이 방망이질을 하시던 엄마를 기억합니다.

겨울옷은 솜이 누벼진 채로 빨 수 없으니 옷을 다 뜯어서 빨래를 한 후 다리미 방망이질을 하고 다시 목화솜을 펴 누비고 꿰매고 동정을 달고 하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셨지요.

할머니와 화로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아 인두질을 하며 옷매무새를 만지시고 버선코를 뒤집으시던 그 정경은 마치 옛날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습니다.


제가 아주 어릴 적엔 물을 동네 우물에서 길어다 먹던 시대였습니다. 빨래는 당연히 논 가운데의 포강에 가서 해야 했습니다. 포강 언저리에는 커다랗고 넓적한 돌 빨래판이 있었고 그 빨래판 위에서 힘껏 방망이 질을 하며 빨래를 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1960년대 청계천 기록 사진에서나 보았을 듯한 풍경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울 막내 똥 기저귀를 포강에 가서 빨면 포강에 사는 송사리들이 무수히 몰려오고는 했습니다. 왜 몰려왔는지 이해하시는 분들이 계실까요?


온 가족이 덮는 사계절 이불 빨래는 택일을 해서 큰 맘먹고 해내야 하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솜이불은 한 땀 한 땀 바느질 된 무명 이불 홑청을 모두 뜯어내서 흰 빨래는 희게 검은 빨래는 검게 빨은 후 마당에 여러 줄의 빨랫줄을 걸고 말리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불 빨래를 한 날은 바람결에 휘날리는 이불 빨래들 속을 드나들며 숨바꼭질을 하느라 엄마와 할머니의 그 고된 노동은 살필 겨를이 없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똥 기저귀를 빨아서 키운 어린 자식들은 간데없고 어디서 저런 어르신들이 생기었나 어디서 오시었냐고 하십니다. 그 표현이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아무리 다 큰 자식이고 늙어가는 자식이라도 어르신들이라니요. 우리 엄마의 자식을 대하는 태도가 여기에 담겨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이건만 이제 모두 장성하여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는 어른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기뻐하시며 감탄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낳으신 어르신들은 잘 살고 있습니다.

보고싶습니다.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