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소풍

여섯 권의 일기장

by 송담

10. 밤과 대추만 남아 잇네


2011년 5월 15일


오늘도 좋은 하루 데주세요

오늘은 일요일이다 화단의 풀을 맷다

연산홍이 하도 고와서 지지말고

고대로 봄내 잇엇으면 좋겟다

꽃이 지면 잎이 피고 하건마는

인생이란 한 번 가면 그만인가

우리님도 한 번 가면 그만일세

나 혼자 옛생각하면서 풀 만 매누라

내가 나이 먹고 보니 추억이 생각이 나는구나

고생도 하엿건만 이제 와서는 깃부고 즐겁다


2011년 5월 27일


오늘도 좋은 하루 데주세요

오늘은 아들들도 다 오고 딸들도 다 오고

내가 원햇던 갑오징어도 사다주어서

잘 먹고 웃수면서 제사 잘 지내엇다

제사 다 지내고 내일 출근하려고 다 가고

큰 딸도 일이 밧바서 가고 나 하나만 남앗다

님 떠난 항구에 파도와 물결만 남앗고

님 떠난 이 가슴에는 무엇이 나마인는가

님이 주신 밤과 대추만 남아인네


2011년 6월 24일


오늘도 좋은 하루 데주세요

오늘은 할머니 제사가 돌아왓습니다

그렇게 고생도 많이 하시고 가신 시어머님이신데

제사 잘 차려 지내야지

고마운 어머님 감사하신 어머님 그 은혜를 내 생애 못잊을 어머님

하늘 같이도 높은 사랑 하해와 같이도 깊은 사랑을 어이 이즐소냐

아들 딸 손자 다 왓다가고 나만 홀로 안저서 아들 딸 잘 가라고

빌고 빌고서 잠 잔다오



이 일기들을 읽으면서는 그저 감탄만 나옵니다.

우리 어머니는 공부를 깊이 하셨더라면 위대한 문학가나 시인이 되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화창한 봄날 여든 할머니가 집 앞 정원의 봄꽃들에 둘러 쌓여 앉아 풀을 매고 계십니다. 영산홍이 하도 고와 봄내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꽃이 지면 잎이 피고 내년에는 또 꽃을 피우겠지만 인생이란 한 번 가면 그만인지 우리님도 한 번 가니 그만일세라고 인생의 허무함과 애석함을 적으셨습니다.


봄이 와서 온 천지에 만화방창 꽃들이 피어나고 꽃향기는 바람을 따라 흐르고 새들은 지저귀겠지요. 노인네 혼자 꾸려가는 쓸쓸한 시골집에도 예외 없이 봄은 찾아오고 봄꽃들은 흐드러지고 이런 정취를 바라보는 노인네의 마음은 예쁜 꽃에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어길 수 없는 자연과 인생의 섭리 앞에 생각이 다다릅니다. 옛날 생각을 해보면 궂은일 힘든 일 좋은 일 등 모든 일들을 함께 했던 님은 이미 떠나고 님과의 생은 모든 것이 그만일세라고 적으셨습니다.


봄꽃들이 온갖 색으로 치장을 해 화려한 만큼, 봄 나무의 새순이 여리고 보드라운 만큼 어머니의 가슴은 수백 년을 산 고목나무의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셨을 것입니다. 12 식구 살림을 살며 고생하던 일, 그것도 지나버리니 그저 추억일 뿐이고 지금 와서는 기쁘고 즐겁다 하십니다.


그 오랜 세월을 속을 썩어가며 살아냈을 커다란 고목은 이제 속은 비었을지라도 거친 나뭇껍질의 물관과 체관을 통해 아직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힘차게 뻗어 올라오는 봄의 수액을 느꼈을 것입니다.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그 수액은 봄이 주는 커다란 생의 환희와 기쁨이었겠지요.

이처럼 만산홍엽 아름다운 봄날을 노래하며 먼저 떠나신 님이나 그리워할 만큼 일이 없고 한가해지신 우리 엄마의 평안한 일상을 엿볼 수 있어 즐겁습니다.


5월 27일 일기와 6월 24일의 일기를 읽고서는 그만 눈물이 터졌습니다.

27일은 아버지 제사 24일은 할머니 제사였습니다.

두 날 모두 제삿날에 모든 자손들이 모여서 제철 해물에 여러 가지 제사 음식을 마련하여 화기애애하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는 정경이 담겨있습니다.


얼핏 떠오르는 옛 생각에도 할아버지는 제문을 쓰시고 향을 깎고, 아버지는 밤을 치고 대추를 괴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 일을 오빠와 남동생이 대를 물려했겠지요.

다들 그렇게 풍성한 제수를 차려 웃으며 제사를 지낸 후 자손들은 모두 내일 출근을 위해서 어머니만 남겨놓고 제 구락쟁이로 돌아들 갔나 봅니다.


‘님 떠난 항구에 파도와 물결만 남았고

님 떠난 이 가슴에는 무엇이 나마 인은가

님이 주신 밤과 대추만 남아 인내’


자식들을 밤길로 다 따나 보내고 어머니 혼자 일기를 쓰시며 일으킨 상념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한 편의 시조와 같은 문장입니다. 어머니가 어디선가 보시고 이런 문장을 빌려 쓴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구가 나오는 문학 작품이나 시나 아니면 노래가 있는지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글은 어디서 보고 따오신 게 아닌 일기에 적으신 그대로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었습니다. 어머니 글에 나오는 밤과 대추는 결혼식 때 폐백으로 올리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자손의 번창과 부모님의 장수를 기원하는 음식이지요. 제사에서도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렇게 제사를 지내고 읊어낸 한 수의 시조가 자식의 마음을 울립니다.


아버지와 혼인을 하고 밤과 대추로 언약을 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혼자 남아 자식들의 성공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과 또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음을 느낍니다.

다른 제수들을 다 마다하고 오로지 대추와 밤을 남겨 준 아버지를 생각하며 엄마는 무슨 생각이 드셨을까요. 당신이 남겨 주고 간 자식들과 여전히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이겠지요.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아립니다.

어머니! 밤과 대추만 남았다니요.


참고:구락쟁이는 아궁이를 이르는 서산 사투리로 각자의 집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