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권의 일기장
12. 백설 가튼 목련이 다 피어서
2012년 04월 13일
오늘도 좋은 하루 데주세요
오늘은 집에서 여러 가지 공부하고 봄나물도 뜻고
홍매화도 피고 개나리도 피고 진달래도 피고 목련도 피고
여러 가지 꽃이 다 피고 완전한 봄이로구나
한 번 가신 우리님은 소식도 엇구나
올 봄에 꽃은 더욱 곱기도 하다
내가 몸 건강하면 고만이지 무어슬 더 바라나
나무관세음보살 부처님 감사함니다
2012년 04월 17일
오늘도 좋은 하루 데주세요
오늘은 화요일이다 복지원에 가서 양승규 교수님 강의듯고
김지선 노래 배우고 점심 식사하고 건강 체조 하고
오늘도 무심한 세월만 흘러가는구나
잡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하는 거슨 세월이구나
아까운 내 청춘도 다 지나가고 꽃피는 봄철도 다 지나가는구나
백설 가튼 목련이 다 피어서 나 혼저 보기 아깝다
2012년 04월 27일
오늘도 좋은 하루 데주세요
오늘은 금요일이라서 집에 이섯다
가시오갈피가 다 피는데 넷째가 언제나 올나나 모르것구나
멍이도 다 피고 가시오갈피도 다 세는구나
봄이 돌아와서 꽃도 피고 있고 참 좋은 계절이다
인생은 한 번 가면 고만이건만
식물은 봄이 오면 또 다시 곱게 피는구나
허무한게 인생이더라 한 번 가면 고만이더라
2012년 4월 동안의 며칠의 일기입니다.
무엇이라 더 덧붙일 말이 없을 만큼 시적인 감성이 흘러넘치는 엄마의 일기입니다.
일기 한편 한편이 모두 완벽한 시처럼 느껴지고 인생에 대한 달관이 묻어있습니다. 더구나 비문이 한 문장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글솜씨입니다.
봄이 와서 온갖 꽃들이 피어나도 한 번 간 인생은 허무하게 고만이더라 라고 적으셨습니다.
백설 같은 목련이 피어 혼자보기 아깝다라는 표현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어찌 목련을 백설에 비유하실 생각을 하셨을까요.
한번 가신 님은 소식이 없고 올해의 봄 꽃들은 더욱 곱다고 적으셨습니다.
봄꽃들이 고울수록 세상이 더 아름다울수록 가신 님이 사무치게 그리우셨나 봅니다.
봄꽃들이 만발하고 지천에 봄 나물들이 그득하니 멀리 있는 자식들 생각은 더 나셨나 봅니다.
넷째가 나물을 뜯으러 올 때가 됐는데 언제나 올라나 이제나 저제나 기다립니다.
그 새 봄나물들이 다 피고 세어질까 봐 걱정입니다.
넷째인 저는 그때 무슨 일이 바빴기에 저리도 간절히 기다리시는 엄마를 뵈러 가지 못했을까요.
지금 와선 죄송하고 아쉽기만 합니다.
사실 시골의 봄 풍경이 방방곡곡 어디나 안 아름다울까요.
하지만 봄이면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우리 고향은 나의 고향이라서 인지 더욱 특별했습니다.
어릴 때에는 꽃밭재에 진달래가 온 산을 붉게 물들여 황홀할 지경이었지요.
집집마다 복숭아꽃, 살구꽃, 앵두꽃 이 피었고 흙담 옆에는 구기자와 골담초가 예쁘게 피었습니다.
하얀 아카시 꽃은 또 얼마나 탐스럽고 향기로웠는지요. 노란 골담초와 함께 생 꽃을 따서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봄기운이 완연하고 사방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날수록 엄마는 마음이 더욱 시리셨을 것입니다.
유난히 고운 봄을 함께 나누며 행복해할 내 님도 없고 기다리는 자식들은 소식도 뜸합니다.
4월 13일에 적으신 ‘내가 몸 건강하면 그만이지 무어슬 더 바라나’라는 대목은 인생을 달관한 엄마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저 부처님 전에 감사하는 마음 가짐으로 만화방창한 봄날의 흥취를 다스리며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이고 무엇에든 감사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또한 이즈음 집에서 공부도 하셨다고 적으셨습니다. 무슨 공부를 하셨을까요.
엄마를 뵈러 갔을 때에 거실 탁자 위에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베스트셀러 도서가 놓여있던 것을 기억합니다. 시골집에 이런 책이 있다니 너무나 생경하여 이 책이 어디서 났느냐고 여쭈어보니 서점에서 사셨답니다.
그때 당시 이 책이 한창 인기가 높고 저자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들이 많아 이 책을 어느 강사님이 추천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엄마는 서점에서 가서 이 책을 직접 사서 셔 공부하듯이 읽으셨을 듯합니다.
엄마는 이렇게 베스트셀러 책 한 권 하나 놓치지 않고 세상과 소통하며 지내셨습니다.
시골집 주변에서 봄이면 온 들판에 봄나물들이 자라나고 이 나물들을 제일 반기는 것은 넷째인 저였습니다. 시간 되는대로 시골에 내려가 엄나물과, 가죽나물과, 옻나물을 따서 맛나게 데치고 무쳐서 엄마를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이뿐일까요. 씀바귀 민들레 구기자 머위 등이 지천이었고 쑥은 한 바구니씩 뜯어 쑥개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봄이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엄마는 이런 선물을 함께 나눌 가족들을 기다리곤 하셨지만 누구 하나 자주 찾아와 주는 자식은 없었나 봅니다. 8남매나 되는 자식들이 말입니다.
‘오늘도 무심한 세월만 흘러가는구나
잡지도 못하고 막지도 못하는 거슨 세월이구나’
오늘도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잡지도 막지도 못하는 것이 세월이라 적으셨습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목이 멥니다. 그 좋은 봄날에 더 자주 찾아뵐 걸 하고 후회합니다.
그러면 뭐 할까요. 잡지 못하는 것이 세월인 것이고 한 번 가면 고만인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