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Oct 02. 2023

왕페이와 블루클럽

여름에 꼭 보는 영화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다. <중경삼림>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전부 좋아하지만,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왕페이이다. 

처음으로 <중경삼림>을 본 이후로 나는 왕페이 스타일에 흠뻑 빠졌다. 화려한 무늬의 반소매 남방, 빈티지한 선글라스, 줄무늬 톱, 그리고 귀를 파고 짧게 쳐낸 숏컷 머리.

그렇다고 따라할 순 없었다. 마치 그 유명한 최양락 단발병 퇴치 밈처럼 될까봐. 왕페이가 하면 하나의 스타일이지만 내가 하면 그냥 옛날 운동선수 머리 같을까 두려웠다. 이미 긴 머리에서 몇년전 숏컷을 한 상태였지만 더 짧은 머리는 또 나 나름의 경계심이 있었나 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냥 충동적으로 미용실을 예약했다. 머리카락에 남은 탈색의 흔적을 완전히 잘라버리고 싶기도 했고, 그냥 흔히 말하는 ‘여자숏컷’ 머리가 거추장스럽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냥 왕페이처럼 자르고 싶었다.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간에!

미용실에 가서 왕페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머리를 잘라 달라고 말했다. 간혹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해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선생님은 호쾌하게 나도 이런 머리 해보고 싶었다며 너무 멋있는 스타일이라며 오케이 했다. (이 경험은 내가 이 미용실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선생님과 나는 신이 나서 짧은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찬양론을 펼쳤다. 그리고 선생님은 아주 시원하게 바리깡으로 밀어주었다.

커트가 끝나고 거울 속에는 삐쭉삐쭉 머리를 한 내가 있었다. 왕페이와는 당연히 거리가 있었지만 (선생님의 스킬의 문제는 아니고 그저 이목구비의 차이이다.) 나는 굉장히 흡족했다. 특히 시원하게 파진 구레나룻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실 처음 막 잘랐을 때는 머리가 길이 들지 않아서 무어라도 발라주지 않으면 정말 방금 블루클럽에서 나온 사람 같기도 했다. 

그래도 뭐 어때!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만 되는 것 단 하나도 없는데 머리카락이라도 마음대로 해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어울리면 좋은 거고, 안 어울리면 뭐 안 어울리는 대로 살지 싶었다.

물론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면 으레 따라붙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반응도 있긴 했다. 그래도 대부분이 시원하고 멋지다고 해 주었다. 특히 나의 멋진 할머니는 내 머리가 호랑이 같고(?) 예쁘다고 했다. 아빠는 자기 어릴 때 모습이랑 똑같이 생겼다고 했다. 

주변인이 내 머리를 예쁘냐, 그렇지 않냐 판단하는 것은 사실 나에게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 자신에게든 누군가에게든 예뻐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버린 지는 오래되었으니까. 그래도 수용되느냐 안 되느냐는 또다른 문제니까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아무 일이 없었다. 

이제는 취업을 앞두고 있어서 머리를 귀 뒤로 넘길 수 있는 ‘여자 숏컷’ 길이로 기르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지만 그냥 참겠다.)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왕페이 머리로 돌아갈 것 같다. 왜냐면 너무 좋고 가볍고 머리 감고 말리는 데 5분이면 되니까요.

작가의 이전글 '쟤도 하는데 나도 하지'의 '쟤'가 되고 싶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