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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05. 2023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중학교 1학년 때 장래 희망으로 ‘공무원’을 써서 내서 담임 선생님한테 혼난 적이 있다. 초등학생들도 공무원을 꿈꾼다는 요즘과는 달리 그때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물론 국가에 이바지한다든가, 정말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뜻이 있어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정년까지 꽉 채울 수 있고, 웬만하면 잘릴 일도 없고. 그냥 무난하다니까, '난하면 좋지 뭐.'하는 생각이었다. 그때의 생각이 씨앗이 된 건지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한 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사실 정말 ‘준비’만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제대로 공부했던 순간이 있었나 싶다.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자리.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어제인지 모르는 것 같은 하루하루였다. 공부 자체가 고되지는 않았다. 계속되는 자기 의심과의 싸움이 힘겨웠다. 매분 매초 ‘내가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이게 맞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게 맞나. 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렵사리 합격한다 해도 내가 원한 게 아니었다면? 그때 가서 때려치울 용기도 내게는 없었다. 수험 생활에 있어서 의심과 불확신은 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괴로웠다. 언젠가부터는 합격하고 난 뒤의 모습보다는 장수생이 된 내 모습만 그려졌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해도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아주 타이밍이 알맞게도 몸이 고장 났고, 나는 그 핑계로 수험 생활에서 도망쳤다. 


그렇게 내리 반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다. 매일 산책하고 매일 내 손으로 채소 밥상을 차려 먹고 좋은 음악을 듣고 운동을 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도망친 것이 도움은 됐다. 그때 했던 기록들이 지금의 내 식사 기록들을 만들어 줬고, 내 삶의 방향성도 어느 정도 만들어 줬다. 그 기록들 덕분에 많은 사람을 만났고 커먼에서 일도 하게 되었고 이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많이 보았던 드라마 <롱 베케이션>의 대사가 떠오른다. 


いつも走る必要ないと思うんだよね。何やってもうまくいかないとき。そういうときは,神さまのくれたお休みだと思ってさ。

언제나 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뭘 해도 잘 풀리지 않을 때. 그럴 때는, 신이 주신 휴가라고 생각하는 거야.

-드라마 <롱 베케이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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