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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범 Feb 25. 2021

대홍단 추억

남한에 처음 와서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늘 친구들의 질문세례를 받곤 했다.
아이스크림을 정말로 얼음보숭이라고 부르냐부터 '북한에도 야동이 있니?'같은 엉큼한 질문까지

녀석들의 궁금증도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가지각색이었다.
짓궂은 녀석들 중에는 한껏 과장된 표정으로 내 앞에서 왕감자 노래를 부르는 녀석도 있었다.


감자~ 감자~ 왕감자~ 참말 참말 좋아요~


그러고는 내게 대홍단 감자를 먹어봤냐면서 정말로 맛있었냐고도 물었다.
대홍단 감자를 먹어 봤냐고?
그때마다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넘기곤 했는데 내 마음은 벌써부터 북방의 어느 작은 시골마을 언덕길에서 헤매이고 있었다. 그 언덕길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묻어두었기에 나는 지금도 가끔씩 그리로 날아가 마음껏 위로를 받고 돌아오곤 한다.

나는 대홍단에서 90km 정도 떨어져 남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서 나고 자랐는데 집안 사정으로 삼촌 내외가 살고 있는 대홍단에서 1년간 지내게 되었다. 내겐 친형이나 다름없었던 사촌 형도 그곳에 있으니 가족들은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좋은 결정이라기보다는 유일한 방도였을 것이다.




대홍단에서 내가 할 일은 숙모님의 농사일을 돕는 것이었는데 나는 사촌 형과 흙바닥에서 뒹구는 재미에 농사일에 금방 적응했다. 북방의 봄은 지지리도 늦게 찾아와 5월 초순이 되어서야 가데기로 밭을 갈고 첫 파종을 시작했다. 호미로 밭의 흙을 고르고 보습 날로 이랑과 고랑을 만든 후 감자를 비롯한 여러 작물을 심었다. 이런 와중에도 사촌 형과 나는 밭머리에 자그마한 오두막을 하나 짓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해 여름과 가을을 그 오두막에서 어른들의 간섭 없이 아주 즐겁게 보낼 요량이었다. 북한에서 오두막은 보통 밭에서 일하다가 쉬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도둑을 쫓기 위한 용도였다.

마침내 파종을 끝내고 우리 오둑막 지붕에 마지막 판자 조각을 얹은 후 바닥에 온돌까지 그럴듯하게 놓았을 때, 사촌 형은 몹쓸 병에 걸려 몸져누웠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한 살 된 삼촌네 개 복실이와 함께 오두막을 지켜야 했다. 복실이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새하얀 개였는데 털이 유난히도 깊고 많아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깊은 밤 세찬 바람소리에 잠에서 깨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히기라도 할 때면, 곁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녀석이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었다. 사실 복실이는 큰 개치고는 너무 예쁘게 생긴 외모 때문에 위협적인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른 아침 복실이의 혓바닥 알람에 눈을 비벼 기지개를 켜면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샘물가에 물 뜨러 가면 근처 이깔나무 방풍림에 걸린 안개가 서서히 미끄러져 위로 올라가 했다. 이내 저 건너편 협동농장 밀 밭 한가운데서 둥근 해가 떠오르면 그제서야 복실이를 데리고 집으로 내려갔다. 마을에서 오두막이 있는 밭까지 가려면 가파른 언덕을 올라 넓게 펼쳐진 평원을 한참 동안 걸어야 했다. 복실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목줄 같은 것을 한 적이 없어서 가고 오는 길에 늘 무언가를 쫓아다녔다. 풀숲을 마구 헤집고 다니다가 작은 메뚜기라도 하나 튀어 오르면 신이 나서 껑충껑충 뛰어날았다. 나는 매일 아침 복실이와  오두막을 나와 아침이슬에 신발이 젖지 않게 조심하면서 집으로 내려와 아침밥을 먹었다. 그리고 숙모님이 정성스레 준비한 도시락을 가지고 다시 오두막으로 올라오곤 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학교에 가지 않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을 농띠형제라고 불렀다. 농띠형제네 오두막이 우리 밭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아 하루종일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어울려 놀았다. 그들은 앓고 있는 사촌 형 대신 복실이와 함께 내게 훌륭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여름 내내 주변 숲에서 나물을 캐고 버섯을 따면서 여기저기 휘젓고 다녔더니 어느 순간 숲 전체가 우리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놀이는 다소 원시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했는데, 우리는 보통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타잔처럼 괴성을 지르면서 나뭇가지 그네를 타곤 했다. 지나가던 마을 어른들이 혹시라도 목격하면 우리를 올려다보면서 긴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그러다 다치면 부모 마음은 어찌 되겠느냐, 위험하니까 조심해서 놀아라.

그 속에는 가지를 그렇게 흔들어대면 나무가 아파하지 않겠냐고 하는 감상적인 어른들도 계셨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른들 보란 듯이 익숙한 몸놀림으로 바닥까지 미끄러져 내려오곤 했다.

해가 저물어 더 이상 광란의 파티를 지속할 수 없게 되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오두막에 모여들었다. 옥수수 이삭이 영글고 땅속의 감자알이 제법 주먹만 해 지면 우리의 저녁 나들이는 군감자에 강냉이를 곁들인 또 다른 파티가 되곤 했다. 어른들은 불장난하면 밤에 자다가 오줌 싼다고 겁을 줬지만 매일 밤 모닥불에 모여 앉았던 우리 이부자리에는 단 한 번도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다. 서로의 코밑이며 볼따구에 그려진 숯검뎅이 수염을 가리키며 배를 그러쥐고 웃다 보면 시간은 언제나 천진난만한 우리의 편이 되어 있었다.                                                         

오두막 생활의 또 다른 별미는 밤마다 의식처럼 행해지는 별구경이었다.
근처에 공장이 없었을뿐더러 혹 있다고 한들 일 년 내내 춰있기 일쑤였으니 우리의 밤하늘은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별구경은 누가 먼저 고개를 들어 별을 세는 것으로 시작된다. 누가 더 많이 세는가로 내기를 하기도 했는데 내 기억에 우리들 중 300개 이상 센 아이는 없었던 것 같다. 별을 세다 보면 별똥별이 떨어지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두 손 모아 소원을 빌어야 했기 때문이다.  농띠형제는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의 유일한 소원은 MP3가 하나 있어서 밤마다 노래를 듣는 것이었다.

오두막에는 복실이 말고도 친구가 하나 더 있었는데 표지도 없고 이미 너덜너덜해진 [몽떼 리스또 백작]이었다. 내게 있던 건 1권뿐이어서 야속하게도 당테스가 감옥을 탈출해 파리 신부가 알려준 보물을 찾는 부분에서 그만 끝나버렸다. 나는 밤마다 가물거리는 등잔불 아래 그 책을 되읽으면서 당테스가 과연 어떤 통쾌한 복수를 할까 상상하며 잠들곤 했다. 책에 심취하여 잠든 어느 밤에는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아쉬운 마음에 아침밥을 차려준 숙모님에게 꿈 얘기를 들려주면 삼촌은 보물을 발견하면 제일 먼저 무엇을 사고 싶냐고 물음으로써 나의 개꿈에 희망을 불어넣곤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멋진 MP3를 하나 장만해 매일 밤 음악 듣는 상상을 했다.

남한에 와서 제일 먼저 읽은 책이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다. 고향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워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탈북했기 때문이다.
이제 당테스가 백작이 되어 당글라르를 용서해준 걸 안다. 하지만 내 오두막이 여전히 따뜻한지는 알 수 없다.
추억에 잠겨 글을 쓰고 있는 이 밤에 나는 오두막 대신 불 밝은 편의점을 지키고 있다.(나는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한다.)
복실이의 자리에는 노트북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책이든 구할 수 있지만 책보다는 넷플릭스를 보면서 지낸다.

이제는 복실이의 새끼들이 여문 콩을 탐하는 꿩들을 쫓아다니고 있으려나...
농띠형은 군대 갔을까.

아니다, 장가가서 어느덧 또 다른 농띠에게 쥐덫 놓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삼촌 내외는 또 어떤가.

아직도 이른 첫눈에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한 감자가 얼어 버릴까 걱정하고 계실까.
이제는 그 누구보다 건강해진, 그래서 군 복무로 고역에 시달리고 있을 사촌 형도 나처럼 그 오두막을 생 하고 있을까.
나는 오늘 밤도  오두막에 내려앉았던 이름 모를 별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따뜻한 모불을 피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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