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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Mar 24. 2023

선녀와 나무꾼

결혼이 성격인증은 아니야



통속된 가요처럼 사랑도 인생도 결국은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선택의 순간에 선택지에 포함되는 그곳에 우연히 거기 있었기에 선택되는. 하필 그날 목욕을 하러 내려온 선녀처럼. 만나지 않았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두 사람이 운명 같은 결혼을 하기 위해 전혀 다른 맥락에서 만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 선녀가 다른 날 목욕을 하러 내려왔다면 나무꾼과 여전히 결혼할 수 있었을까. 그때 그 시간에 그 상황에 같이 있었을 뿐이었다고 한다면.  그런 우연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운명이란 그저 도박처럼 그저 운이 전부인 것인가.



     

사이좋게 늙어가는 TV속 노부부를 보며 그는 말했다. “한 사람과의 결혼생활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도 잘 살았을 것 같지 않아?”    

  


그리하여 인생이라는 그 운이라는 것이 내 힘을 벗어나 그를 어떤 다른 남자로 나를 어떤 다른 여자로 대치해도 지금처럼 살아가는 서로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내가 아니라도 내가 지나고 그렇게 흘러가는 그의 인생길 어디에선가 만난 또 다른 알지 못할 그녀가 나처럼 또 그렇게 살았을지도 아니면 더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첫눈에 반해서 몇 번을 만나지 않고도 결혼을 하기도 하고, 더 옛날에는 얼굴도 모른 채 같이 살았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결혼도 있다. 






50여 년 전 나의 부모님은 신앙과 믿음이 있는 집안이라는 끈 하나만으로 이어져 3개월간 편지를 주고받고 그 후 딱 한번 만나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또 3개월간 편지가 오갔고 결혼을 하였다. 6개월의 편지와 한 번의 만남으로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았겠는가. 어린 내 눈에 부모님은 때로는 고양이처럼 집안에서 우다다 뛰어다니며 장난치기도 했고 때로는 소곤소곤 둘만의 이야기를 속닥거리기도 하셨다. 동시에 가벼운 티격태격에서부터 격랑의 폭풍 같은 분노의 시간들도 지켜보았다.

그러나 50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병석에서 아빠의 마지막을 지켜준 사람은 엄마였고 아빠 또한 홀로 남겨질 엄마를 걱정하셨다.     



 

오랜 기간 지속된 결혼기간이 개인의 성격인증은 아닐 터, 나는 그의 말에 반신반의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결혼생활이란 어쩌면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인의 공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을 정도의 특별히 모난 성격만 아니면 결혼은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

.

.

.


당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 그런 것이 결혼생활이어야 하지 않을까. 수십 년을 사랑만으로 살지는 못한다. 하지만 “너희 엄마가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못 살았다 "라고 병석에서 말씀하신 아빠의 진심이 수십 년을 살게 하는 부부의 비밀이라고 생각한다.  무난한 결혼생활의 원인이란 결국 두 사람의 바람직한 성격이나 특별히 훌륭한 성향 탓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에게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어떤 것 평범하고 무던하여 대수롭지 않아 하찮았던 어떤 것이 아닐까. 공기처럼 항상 있어서 있는 줄 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인 것처럼.




그의 말대로 정말 맞지 않는 사람과는 아예 결혼이라는 것을 시작하지 않으리라는 전제하에, 사는 동안의 수많은 고비를 넘기고도 결혼생활을 수 십 년간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굳이 지금의 사람이 아니어도 그 누가 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갔을 것이다. 

나 또한 그때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또 다른 누군가와 살아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그럭저럭 산 사람들은 얼토당토않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고 터무니없는 선택이 아니라면 또 어떻게든 살아갔을 것이다.  불행하지 않다는 것이 행복하는 의미는 아니므로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아도 살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수십년을 같이 살았다는 것이 성격에 문제가 없다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만큼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남들 다 견디는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하나라면 그 하나는 더 이상 그 누군가에게는 하나가 아니라 100이 될 수 있는 것이 결혼생활이 아니던가.     





서로 다른 것을 각자의 그릇에 담고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바다의 모래알처럼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셀 수도 없이 많아서 한 번도 같지 않았고 같을 수 없는 사랑이 우리는 서로 같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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