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엄마의 엄마
엄마의 외할머니인 꼬부랑 할매는 어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고 가장 목소리가 큰 여자였다. 외할머니와 구별하기 위해 꼬부랑 할매라고 불린 할매는 긴 백발을 쪽지고 허리와 등만 굽었을 뿐 그녀는 우리 모든 친지들 중에 가장 말이 많았고 가장 고집도 세어서 나는 한 번도 할매가 나이가 많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꼬부랑한 등 탓으로 서있을 때도 구부리고 있던 꼬부랑 할매는 10살의 나와 키가 같아 친구 같았지만 또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대장 같았다.
할매 집은 우리 집과 100여 미터 떨어져 있었는데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가끔 할매 집에 가곤 했다. 할매 집에는 꼬부랑 할매를 선두로 외할머니와 이모할머니 거기다가 이웃집 할머니들까지 온갖 할머니들이 늘 엉겨있었지만 그때의 할머니들은 할머니라고 불릴 뿐 그저 나이 많은 여자처럼 내 눈에는 창창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로 늙어가는 엄마와 딸들이 한집에서 평화롭게 살았던 것 같다. 할매 집 대문은 낮밤과 계절이 드나들도록 활짝 열려 있었으며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수시로 들고나고, 고구마, 옥수수, 한과 같은 숨겨둔 간식들이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내게 세상의 전부이고 완벽하여 두려운 ‘우리 엄마아빠’도 할매에겐 ‘느그 애미애비’일 뿐이었지만 그런 욕쟁이 할매가 싫거나 무섭지만은 않았다.
집에 비상시를 대비한 상비약의 개념이 없던 시절에는 갑자기 배가 아프거나 소화가 안되면 민간요법으로 어깨 부분을 툭툭 세게 두드려서 몸을 자극한 다음 어깨에서 손끝으로 훑어내린다. 배가 아플때는 이런 작은 토닥임도 온몸이 울려 흡사 매 맞는 느낌인데 이것이 혈행을 손끝으로 모으는 심오한 뜻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끝나면 엄지손가락에 실을 총총 싸매어 피가 안 통하게 한 다음 그 손가락을 구부려 첫마디 손톱 위의 살 부분을 바늘로 콕 찌르는 치료법이 있었다. 그러면 엄지손가락 끝에 잠시 모여 있던 피가 송글송글 솟구쳐 오르는데 붉지 않고 검은색에 가까운 검붉은 피가 나온다. 그 검은 피가 나와야 비로소 체기가 내려갔다고 믿었다. 피가 검을수록 체기가 심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배 아픈 것보다 더 고역이었다. 그런데 꼬부랑 할매는 무지막지하게 바늘로 손을 찌르거나 피를 보지 않고도 배탈을 멈추게 하는 신기한 치료를 하였다. 바로 할매의 손이었다.
할매는 허리만큼 손가락도 굽었는데 할매의 손이 닿으면 이상하게도 배탈이 멈췄다. 그래서 배가 아플 때면 바늘을 피해 곧바로 나는 할매한테 달려가곤 했다. 보통 때와 다른 모습의 나를 본 할매는 평소와 달리 성모마리아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방으로 올라오라고 하신다. 욕쟁이 할매는 의사가 되어 내가 중병이라도 걸린 듯 애지중지한 손길로 “뭘 먹고 체한 거고?” 하셨다. 천상의 목소리처럼 나지막하고 나긋나긋하고 느린 말투였다. 같은 할매가 맞나 싶다.
할매의 안방으로 이끌려 따라 들어간다. 두꺼운 요를 휙 던지듯 힘 좋게 까신 할매는 그 위에 나를 눕힌다. 나는 할매의 나이만큼 무거운 목화솜이불에 갇힌다.
말을 안 해도 배의 어느 부분이 아픈지 다 아는 할매의 굽은 손가락은 내 작은 배 위에 노처럼 바다를 휘저어 회오리를 일으킨다. 내 배보다 큰 할매의 손이 보자기처럼 나의 배를 싸고 깊은 심연으로 갈 준비를 한다. 몇 번의 할매의 약손 진단과 치료가 끝나고 처방이 내려졌다. “한숨 자라”라는 짧고 간단한 처방만을 남기고 할매는 사부자기 일어서서 방을 나가셨다.
스르륵. 큼직한 창살에 하얀 창호지가 전부인 미닫이문이 열렸다 닫히고 방안은 사라진 할매의 체취로 나는 마취된다. 머리 위 벽장 속 할매만의 비밀공간에 숨겨져 있을 꿀단지에는 오늘은 무엇이 들었을까? 저번에 먹었던 왕눈깔사탕이 아직 있을까?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지칸이 보이는 작은 유리문으로 아궁이에서 탁탁 잔챙이 나뭇가지들이 타들어가고 꼬부랑할매의 굽은 등이 점점 작아진다. 방바닥이 점점 뜨거워진다.
몸이 끓는 물에 잠긴다. 얼음처럼 녹는다.
꿈
엉킨 실타래인 듯 강물인 듯 이무기 용틀임이 온몸을 휩쓸고 온 세상이 울끈불끈 리듬에 맞춰 스륵스륵 넘쳐난다. 넘실넘실 파도를 타고 울렁울렁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강물이 춤을 춘다. 바다가 일렁인다. 그것은 어쩌면 소화운동을 하고 있는 내 창자의 움직임이었을 수도 있다. 분명 굵은 강줄기가 휘돌아 감겼는데 삼킬 듯한 일렁임 위로 친구들의 얼굴이 보인다. 세상은 울룩불룩 정체를 알 수 없는 움직임만이 다인데 그 속에 내 곁의 사람들이 있다.
눈을 떴을 때 방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내가 조금 커졌을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조금 어둑해졌다. 신기하게도 배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지금도 몸이 힘들고 지치면 꼬부랑 할매의 손과 그때 할매 방의 아랫목에서 꿈결에 보았던 실타래 같기도 하고 구렁이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하고 강물 같기도 하던 그 꿈틀거림의 꿈을 꾼다. 그것은 그때는 몰랐던 삶의 한 끄트머리였을까. 지금도 잘 모르는 그 삶이라는 것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