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눈으로 마당은 흰 융단을 깔았다. 사각사각 첫 발자국을 하얀 눈도화지위에 도장처럼 찍으며 내 발밑의 갓 태어난 솜털 같은 눈이 뭉개지지 않게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한발 한발 내디딘다. 조심조심 대문으로 가는 길이 길기만 하다. 새벽 눈이불을 덮고 있는 신문을 호로로 털어 소매로 쓱 닦았다. 따끈한 기름냄새. 책같이 두툼한 신문을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주무시는 아빠방 앞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눈이 오는 아침이면 항상 떠오르는 1980년대 어느 해 즈음의 기억이다. 초등생이던 내게 이것은 매일 아침 내가 맡은 일이다. 신문냄새와 함께 남아있던 나의 유년의 기억들과 사랑이야기들은 나의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는 무언가를 고여낸다.
아빠의 서재에는 신동아, 월간조선, 등 월간지와 김형석 이어령 함석헌 이영희 등의 사상집, 수필집, 조선실록, 한국단편소설전집 등이 꽂혀 있었다. 아무리 바쁘셔도 아침마다 신문을 꼼꼼히 읽으시던 아빠. 그런 아빠의 덕택으로 30권의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다 읽은 후에 뭐든 글자에 빠진 나는 아빠의 그 책들 앞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린 날의 하루는 왜 그토록 길고 잊히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 책들의 퀴퀴한 냄새와 축축한 책 넘김은 내가 이제 그 책들만큼 나이 들어 가는데도 여전히 살아나는 신비로움이다.
옛날옛날 어느 마을에..
옛날에..
나는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낯선 집에 가면 제일 먼저 책꽂이의 책들에 자석처럼 끌려가서 그 앞에 서서 이야깃 거리가 있는 책들에 얼굴을 묻고 책속의 사람들의 삶에 들어가는 것이다.
무수한 옛날옛적에 이야기는 항상 한가지 걱정으로 시작한다. 그 걱정이 없었다면 이야기가 아닐 것 같이.
태평양같은 평화로운 세월에 풍파를 일으킬 딱 한개 근심. 그 작은 절망은 세상을 바꾸고 시간을 움직인다. 그것만 아니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한 가지 소망이나 걱정, 간절함이 그들을 살게 하고 죽게 한다. 그것 때문에 그들이 거기 있는 것처럼 그들을 울게 하는 그것.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 장은 언제나 그 후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로 끝난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그 뒤로 그들은 다시는 걱정없는 세상을 살았을까.
나는 자꾸만 그 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림책 속의 마지막 장 행복한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행복이 이런것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을 아닐까.
행복이라는 것이 그렇게 오래가는 것이 아님을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그 후로 계속되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