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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Apr 14. 2023

속독법의 유혹

삶의 비결은 없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어느 날 신문 사이에 끼어있던 찌라시 한 장. 광고나 유인물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그런 작은 전단지 한 장은 신문보다 관심을 끌고 효과도 막강했다. 지방 소도시의 작은 동네에서 별다른 소식이랄 게 없던 그날이 그날 같은 날들의 평온함 속에서는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은 그게 무엇이든 아주 유익했고 가뭄에 단비 같은 꿀 정보가 되었다. 특히 귀가 얇은 펄렁 귀라 마음까지 펄렁펄렁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넘길 수 없는 너무나 달콤한 인생의 지름길 내지는 삶의 숨은 비결 같은 것이 되기도 했다.  


    

그날의 찌라시는 속독법을 가르친다는 한 장짜리 광고였는데 그 내용은 속독, 즉 책 한 권을 1분 만에 읽을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책을 많이 읽게 되니 학습에도 도움이 돼 학교 공부를 잘할 수 있게 된다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당시 나의 엄마는 교육열이 나름 뜨거워서 학교 숙제만으로는 만족을 못 하시고 일일학습지라고 지금의 방문학습지 같은 것을 매일매일 배달받게 했는데 학교 진도에 맞는 학습 내용을 과목별로 요일별로 매일 문제은행식으로 하루 한 장씩 푸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방문교사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문제를 혼자 푸는 것으로 공부 습관을 들이는 것이었다. 매일 방과 후에 집에서 동생들과 학교 놀이를 한창 진지하게 하고 있을 때 학습지 배달 아저씨가 문제 한 장을 들고 오시면 선생님이었던 내 역할은 금세 김이 빠져 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즈음에 점차 나는 그 학습지의 문제보다 제일 밑단에 있는 뱀파이어들의 사랑에 관한 연재만화에 더 흥미를 느끼며 공부가 재미없어지던 차였다.    


  

내가 공부가 시큰둥해지는 것을 곧바로 눈치챈 엄마는 때마침 날아든 속독법의 효과에 매료되어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는데 나 또한 정말로 책을 그렇게 빨리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기도 했다. 그 말대로 된다면 전교 일 등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것을 배워서 서점에 가서 한자리에서 많은 책들을 돈도 안 내고 다 읽어버리면 되겠다고 하는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속독법이라는 것을 꼭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토요일 오후 그날따라 유난히 반짝이는 아름다운 5월의 햇살을 뒤로하고 개강일에 혼자(전교 일 등의 비법은 비밀이어야 하기에) 강의실에 들어섰더니 시간에 맞춰 온 대형 강의실은 이미 꽉 차 앉을자리가 없었다. 공부를 잘할 수 있는 비법과도 같은 이런 비밀 정보가 신문 광고에 실리는 바람에 다 소문이 난 모양이라고 안타까워하며 나는 어쩔 수 없이 제일 앞에 남아있는 빈자리로 갔다. 등 뒤로 사람들의 눈이 일순 내게로 꽂혔는데 나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늦어서가 아니라 그 눈이 거의 전부가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집에 남자라고는 아빠밖에 없던 우리 집에서 제일 숫기가 없었던 내가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언뜻 보기에 내 눈에는 다 아저씨 같았다. 취직 준비하는 젊은 동네 아저씨들이 다 모인 듯했다. 속독법은 역시 꼭 배워야 하는 건가 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다니. 역시 오길 잘했어.      

대충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등 뒤로 시선들이 여전히 따끔거렸지만 헐레벌떡 등록할 때 급하게 받았던 교재를 펼쳤다. 아, 제대로 받은 교재가 맞는지 순간 다시 놀랐다. 유치원 줄 긋기 책도 아니고 그 두툼한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점과 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단지 선 긋기 책과 다른 것은 책의 전반부에는 선들의 간격이 컸다가 점점 책의 끝부분으로 갈수록 일반 책 간격으로 글자 대신 선이 있었다. 마지막 부분은 소설 같은 내용의 짧은 글이 있었다. 

상황 파악이 안 돼 멍하게 있는 차에 여자 강사가 들어왔다. 앉아 있던 젊은 남자들의 소리 없는 환호가 들리는 듯했는데 여자 강사도 그것을 아는 듯 짧은 플레어스커트를 높은 슬리퍼 위에서 휘날리며 즐거운 듯 호호호 연신 웃음을 흘렸다.      



속독 연습은 강사가 시간을 재는 동안 빠르게 책에 있는 선을 눈으로 따라가며 보는 것이었다. 가능한 한 빠르게 빠르게. 침묵이 흐르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눈이 아프다. 눈동자만 계속 계속 굴리면서 의미 없는 선을 따라가니 눈이 따끔거리고 눈물이 흐른다. 이게 정말 도움이 될까 그 생각만 하면서.    


 

그 후로 몇 번 더 수업을 갔는지 안 갔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 내가 배운 속독은 그 뒤 나의 책 읽기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 책을 빠르게 대강 훑어 읽는 통독에 열중하다 보니 의미를 빠뜨리거나 몇 개의 단어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생겼다. 오히려 정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집중을 해야 하는 부작용이 나타나서 고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속독은 속독 연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정독을 많이 하면 저절로 되는 것임을. 그것은 마치 달리기를 잘하기 위해서 아직 많이 걸어보지도 않은 사람에게 달리기 연습만 시키는 것처럼 위험할 뿐이라는 것을.      



그 뒤로 광고에 나온 문구대로 1분에 한 권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책을 휙휙 넘기며 읽지도 못하고 학교 성적에도 특별한 차도가 없는 나를 보자 엄마의 속독법에 관한 기대는 꼬리를 감추었다. 아빠가 아셨다면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라 이날의 사건은 아직도 엄마와 나만의 비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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