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아 Apr 12. 2023

윷놀이대회의 기억

몰라야 이긴다


1980년 국민학교 5학년 때, 추석즈음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학년별 민속놀이대회가 열렸다. 제기차기, 투호 던지기, 씨름, 윷놀이 같은 몇 가지 종목이 있었던 기억이다. 반별로 선수가 차출되어야 했는데 아이들은 별 호응을 하지 않고 시큰둥했다. 그때의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놀 것이 많았고 더 재미있는 놀이가 많았는데 그런 대회에 나가봤자 노는 시간만 뺏긴다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무슨 대회니 그런 것들이 또래들과의 놀이처럼 하기 싫다고 마음대로 중간에 그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싫든 좋든 이것저것 제약도 많고 귀찮기만 하였다. 자발적인 지원자가 없자 담임선생님은 어쩔 수 없이 몇 명을 강제 할당했는데 그중에 나를 윷놀이 선수로 지목하셨다.  

    

그 나이까지 윷놀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갑자기 선수로 나가야 하는 것이 마치 비무장 상태로 전쟁터에 서서 총알을 맞으러 가는 총알받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선생님예, 내(나는), 윷놀이 우찌 하는지 모르는데예..” 

나의 해명에도 아랑곳없이 선생님은 “괘안타. 시키는 대로 니는 고마 던지면 된다.”     

 

놀이의 규칙은 고사하고 윷을 만져보지도 못한 나를 대회에 내보낼 생각을 하시다니 내가 그리 만만하셨나 싶다가도 그래도 우리 반의 우승에 대한 기대감에 불타있는 선생님의 열의를 보니 그냥 막 나를 대회에 던진 것은 또 아닌 것도 같았다. 나를 왜 지목했는지 그 이유만을 생각하며 며칠을 보내다가 기어이 대회 날이 왔다.     

방과 후 친구들과 같이 집에 가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빌어먹을 윷놀이대회 때문에 끌려가듯 다른 반으로 이동했다. 이미 교실은 장터가 되어 각반에서 차출된 선수들과 심판과 응원하는 선생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실제로 그날 처음 보는 실물 윷판은 책에서만 보던 조그마한 것이 아니라 대문짝만 한 전지였고 윷은 내 작은 손에 한 번에 다 쥐어지지도 않을 만큼 큰 나무토막들이었는데 윷놀이의 윷 자도 모르는 나는 그것을 보고 더욱더 주눅이 들어 대인국에 온 걸리버처럼 나는 더 작아졌다.   

        

나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윷놀이를 할 줄 아는지 따로 놀이의 규칙을 설명하는 시간은 없었다. 토너먼트 순서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나는 담임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냥 던지기만 하면 되었다. 돌아가면서 내 차례가 되면 말 그대로 그냥 던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던질 때마다 윷이요!!라고 하면서 말을 움직이던 선생님들이 더 신이 나셨다. 말이 어디로 가야 이기는 것인지도 모르는 나는 이상하게도 선생님들이 원하는 대로 모면 모, 개면 개 부르는 대로 척척 나왔는데 교실 윷판은 선생님들의 환호와 함성으로 거의 도떼기시장이 되었다. 이 대회는 아마도 어른들을 위한 것이었나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날 윷놀이대회에서 영문도 모르고 생각지도 못한 일등을 하게 되었는데 즐겁지는 않고 왠지 알 수 없는 야릇한 마음이 들었다. 윷놀이가 주는 재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상까지 받게 된 것이 윷놀이에게 미안했고 또 일등까지 했지만 여전히 윷놀이에 대해 규칙도 뭐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윷놀이대회에서 상을 탄 뒤로 아빠는 정식으로 윷놀이판과 윷을 사 오셨다. 그리고 그 뒤로 가끔 집에서 우리 가족은 윷놀이를 했는데 역시나 아빠가 제일 재미있게 윷놀이를 즐기셨다. 그리고 나는 윷놀이를 하면 할수록 잘 던지지 못했다. 아빠는 내심 내가 윷놀이에 소질이 있나 하고 기대를 하신 듯 “니 일등 한 거 맞나?” 하셨지만 윷놀이의 규칙을 다 알게 되고 제대로 이겨보고 싶다고 생각할수록 그날처럼 좋은 패가 나오지 않았다.  그날 윷놀이에서 내가 이긴 것은 아마도 아무것도 몰라서 아무 욕심이 들어가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운으로 하는 게임은 차라리 아무것도 몰라야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선생님은 알고 계셨을지 모른다. 선생님 눈에 내가 그리 태평하게 보였나 보다.     


그 뒤로 나는 윷놀이를 하면서 원하는 대로 패가 나올 때의 재미를 알게 되고 원하는 대로 판이 돌아가지 않아서 속상하고 그러다가 한번 좋은 패가 나오면 판을 뒤집듯이 쾌재를 부르게 되었다. 욕심이 생길수록 더 재미있어지고 더 지게 되고 그래서 더 재미있어지는 윷놀이를 어른들이 왜 더 좋아했는지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털팔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